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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만의 비밀스러운 삶
아틀레 네스 지음, 박진희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베른하르트 리만. 노르웨이 출신의 작가 아틀레 네스가 아니었다면, 평생 리만의 가설 혹은 제타함수 같은 19세기 천재 수학자의 연구 성과에 대해 몰랐으리라. 사실 리만만큼이나 역사와 허구가 뒤범벅으로 중첩된 <리만의 비밀스러운 삶>의 작가 아틀레 네스 역시 생소하기만 하다.
소설은 이 소설의 화자인 티리에 라이트너 후세라는 40대 중년 수학 교수의 실종신고로 시작된다. 서두에서도 말한 독일 하노버 출신의 천재 수학자 리만의 평전을 쓰겠다는 프로젝트에 헌신해서, 작문강좌에도 나가던 그가 왜 갑자기 사라져 버린 걸까? 미스터리물의 공식대로, 남은 사람들은 그가 남긴 자료로 그의 과거 행적을 추적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핵물리학 등 현대 과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진 베른하르트 리만이 남긴 위대한 수학적 업적은 그를 불멸의 제단으로 이끌었다. 이런 위대한 인물의 생애를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힌 티리에는 그의 우상처럼 글쓰기에는 젬병이었나 보다. 그래서 작문강좌에 등록하고, 뒤늦은 글쓰기를 배운다. 문제는 그렇게 시작한 작문강좌가 그의 삶에 잔잔한 파문을 던지게 되는 발단이었다는 점이다.
티리에는 작문강좌에서 할덴이라는 도시에 사는 동갑내기 독일어 교사 잉빌드를 만나게 되고, 20년의 결혼생활이 주지 못했던 짜릿한 긴장과 흥분에 휩싸이게 된다. 각각 두 명의 십대 자녀를 둔 두 사람은 티리에가 수행 중인 리만 프로젝트를 함께 하면서 공고한 유대감을 구축한다. 티리에의 아내 카린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특별한 감정은 리만처럼 한때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형성되었을 도덕관념 때문에 고통의 원천으로 작동한다. 외도를 저지르는 여느 가장처럼 그렇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사랑을 쫓을 수도 없는 판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티리에와 잉빌드의 리만 프로젝트는 리만이 활동했던 독일 괴팅겐으로까지 확대된다.
아틀레 네스의 매혹적인 <리만의 비밀스러운 삶>은 19세기 실존 인물이었던 리만 교수의 행적과 그의 삶을 추적하며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 버린 티리에와 잉빌드 두 사람의 이야기를 큰 축으로 한다. 이런 다층적 구조를 통해 작가는 자신이 쫓는 우상처럼 점점 변해가는 티리에의 삶에 방점을 찍는다. 풀리지 않는 리만의 가설처럼, 티리에 역시 어느 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증발해 버린다. 티리에의 삶은 그 자체로 미스터리가 되었다.
이런 두 가지 축에 권태로워 보이는 중년 부부의 삶 그리고 언제든지 위기로 치달을 수 있는 십대 청소년 자녀를 둔 노르웨이 중산층 가정의 모습도 슬쩍 작가는 내비친다. 티리에의 아내 카린이 가르치는 노르웨이어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지만, 자신의 전공인 수는 전 세계적인 공통어라는 표현에 눈길이 간다. 그래서 티리에는 자신이 쓰는 리만의 평전도 아름답고 매혹적이면서도 명확한 수처럼 날카롭고 명료하게 저술하고 싶어한다. 물론, 냉철한 현실주의자답게 티리에는 외도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차가운 현실’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을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 등장했는데 그게 자신의 아내 카린이 아니라는 사실 앞에 티리에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티리에는 수학의 세계가 아름답고 매혹적이라고 강변한다. 하지만, 거의 강제로 하고 싶지 않은 수학공식과 처절하게 싸워야 했던 학창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티리에가 말한 것처럼 수학의 세계와 결별하는 대로 가능한한 빨리 잊으려고 경주를 하지 않았던가. 나뿐만 아니라, 노르웨이 사람도 그랬다는 공범의식에 즐거웠다.
아틀레 네스는 소설의 실질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리만 교수와 화자 티리에 사이에서 마치 저글링 하는 듯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둘 사이에서 어느 쪽에서도 치우치지 않는 절묘한 균형감각이 놀랍다. 하지만, 티리에는 리만의 삶의 궤적을 쫓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우상처럼 변해 버린 자신의 모습에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요즈음 조이스 캐럴 오츠의 장편 <블론드>를 읽다가 잠시 독서 슬럼프에 빠졌었는데,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오게 해준 아주 고마운 책이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