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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빅터스 - 우리가 꿈꾸는 기적
존 칼린 지음, 나선숙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먼저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해야겠다. 노벨평화상에 빛나는 남아공의 흑인 지도자 넬슨 만델라에 대해 뉴스 미디어를 통해 수없이 들어왔으면서도, 정작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늦었지만 존 칼린의 르포르타주 <인빅터스>를 통해 남아공 백인들이 ‘합법적으로’ 다수의 흑인을 억압하고, 갖은 폭력과 만행을 자행하는 근간이 되었던 악명 높은 아프리칸스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하는데 앞장선 넬슨 만델라에 대해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조국 남아공과 그들이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럭비 경기(비록 백인들의 스포츠지만!)에 대해 알게 됐다.
나의 오해 한 가지가 더 있다. 그동안 남아공은 영국계 백인이 지배해 왔다고 착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백인 우월주의를 악착같이 주장했던 이들은 바로 네덜란드계 백인의 후손인 아프리카너(혹은 보어인)라는 사실이었다. 여러모로 개인적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는 책이었다.
<인빅터스>는 넬슨 만델라의 인종차별정책 차별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과 훗날 그가 남아공의 대통령이 되어서 평화와 화합을 위해 적극적으로 후원을 했던 아프리카너들이 그야말로 신줏단지 모시듯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럭비 경기에 초점을 맞춘다. 뉴질랜드와의 럭비 월드컵 경기가 열리던 1995년의 시점에서 존 칼린은 플래시백 구성으로 남아공 흑인투쟁의 역사를 잔잔하게 들려주기 시작한다.
존 칼린은 먼저 럭비가 남아공의 지배계급이었던 아프리카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독자에게 알려준다. 유럽에서 아프리카 대륙으로 건너와 항구적인 생활터전을 마련했던 이민자들에게 조금은 거친 럭비야말로 그네들의 삶을 대변하는 스포츠 중의 스포츠였다.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인종차별정책으로 그들과 대척점에 섰던 흑인들에게 럭비와 대표팀인 스프링복스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27년간의 기나긴 투옥생활을 통해 아프리카너를 이해하게 된 정치적 인간 만델라는 럭비라는 스포츠가 흑백대결로 갈라진 남아공 통합의 핵심적 요소가 되리라는 것을 간파했다.
<인빅터스>는 시간의 수레바퀴를 돌려서, 인간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찾기 위한 남아공 흑인투쟁의 역사 속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1980년대 후반, 인종차별 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끝없는 비난과 자국 내 흑인들의 투쟁에 직면하게 된 P.W. 보타가 이끄는 남아공 정부는 마지막 수단으로 그동안 테러조직으로 간주해왔던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의장이자 상징으로 모든 남아공 흑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넬슨 만델라와 비밀협상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남아공의 백인들이 가진 생래의 불안감, 다시 말해 만약 1인 1투표제라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이 되는 국민투표를 했을 경우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흑인정권이 탄생하게 되리라는 불을 보듯 뻔한 상황에서 그들은 끝까지 자신의 기득권을 잃을 수도, 그동안 탄압받아온 흑인들에게 분노와 증오에 찬 복수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만델라는 정확하게 간파해냈다. 더 중요한 것은 500 만에 달하는 남아공 백인들을 껴안지 않고서는 국가존립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만델라의 탁월한 정치적 식견에 감복했다.
무장투쟁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백인정권으로부터 종신형을 선고받은 만델라는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기나긴 옥중생활을 통해, 자각한 아프리카너들과 함께 국가경영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만델라는 석방 후 지루하면서도, 일상처럼 벌어지는 폭력과 내전발발의 일촉즉발의 위기에서도 평정심을 지키면서 평화적인 정권교체라는 그야말로 기적을 일궈낸다. <인빅터스>의 후반부에서는 그가 어떻게 해서 럭비 경기를 재료로 삼아 국가통합과 인종화합이라는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냈는지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공교롭게도 이달에 개봉한 동명 제목의 영화 <인빅터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메가폰을 잡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두 명의 배우인 모건 프리먼과 맷 데이먼이 각각 넬슨 만델라와 남아공 럭비 대표팀인 스프링복스의 주장인 프랑수아 피나르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쳐 주었다. 원작 르포와 차이점이라면 책에서는 상당 부분이 만델라의 투쟁과 삶이 중심이었다면, 영화에서는 초반부의 뉴스영화 형식으로 그의 삶이 소개되고 대부분이 럭비 월드컵 경기로 채워졌다는 점이다. 2010년 3월 좋은 책과 멋진 영화를 한꺼번에 만나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인빅터스(Invictus)는 라틴어로 ‘정복되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영국출신의 시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가 1875년에 쓴 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제목 한 번 기가 막히게 뽑았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