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The Gorgon's Look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0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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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마지막 날을 노리즈키 린타로의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를 읽으면서 마무리했다. 비채에서 2007년 4월 이래 계속해서 출간되고 있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의 20번째 작품으로 교토대 출신의 추리소설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의 작품으로는 국내에 두 번째로 소개됐다. 십 년 전쯤에 출간된 <두 동강이 난 남과 여> 못지않게 섬뜩한 제목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미국 출신의 소설작가로 프레데릭 대니와 맨프레드 리가 창조한 엘러리 퀸에 대한 오마쥬로 주인공의 이름이자 작가의 필명 그대로 노리즈키 린타로가 등장을 한다. 추리소설 작가이자 아마추어 탐정인 노리즈키 린타로는 우연히 들르게 된 고등학교 후배의 사진전에서 가와시마 에치카라는 미모의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저명한 전위조각가 가와시마 이사쿠의 외동딸이란 걸 알게 되고, 그녀의 삼촌인 가와시마 아쓰시와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심각한 병을 앓고 있던 에치카의 아버지 이사쿠가 급사했다는 소식과 함께 이야기의 수레바퀴는 급회전하게 된다. 라이프캐스팅으로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모델로 해서 만든 조각상의 머리 부분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사쿠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회고전을 주도하게 된 미술평론가 우사미 쇼진은 경찰에게 알리지 말고 조용하게 이 사건을 처리하자고 유족들을 설득한다. 그렇게 해서 린타로는 사건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

린타로가 현장의 단서를 실마리로 해서, 핵심에 들어갈수록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에치카를 한 때 스토킹했다는 사진가 도모토 슌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는 가운데,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예의 사건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는 자책에 시달리면서도 린타로는 수사의 끈을 놓지 않는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가와시마 집안 내력에서부터 시작해서, 교묘하게 수사를 방해하는 우사미 쇼진의 숨겨진 의도, 그리고 이어지는 에치카 탄생 비밀에 이르기까지 진행형의 사건은 복잡하게 전개된다. 게다가 주인공 린타로는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도모토 슌과 그의 내연녀 야마노우치 사야카에게 여러 차례 당하면서도 실낱같은 단서와 직감에 의지해서 담대한 수사를 펼쳐 나간다.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한 저명한 전위조각가가 남긴 유작 작품에 얽히고설킨 과거사를 파헤치는 구성이다. 각 장의 머리에 등장하는 루돌프 비트코어의 <조각의 제작 과정과 원리> 그리고 미술평론가인 우사미 쇼진의 입을 통해 독자는 조각이라는 전문적인 세계로 초대된다. 사실 조각에 대해서 문외한인 나 같은 독자를 위해, 고대 그리스 이래 조각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실존 인물로 회화에서 조각으로 전향해서 인체를 본뜬 석고상을 조각한 조지 시걸(George
Segal)의 아이디어를 빌려서, 아시걸(亞Segal)로 불리며 자신의 조각 세계를 구축했다는 가와시마 이사쿠의 조각 세계에 대한 설명 또한 일품이었다. 책 뒤편에 나와 있듯이, 작가의 리서치 노력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게 된 가와시마 이사쿠는 자신의 유작을 통해, 모두가 잊고 싶은 과거를 현재로 소환한다. 이사쿠의 바람과는 달리 자신의 메시지가 다른 끔찍한 범죄를 유발한 가운데, 린타로는 조각나고 은폐된 단서들을 바탕으로 숨겨진 비밀과 음모를 파헤친다. 주인공 린타로는 공권력을 집행하는 경찰이 아니기 때문에 작가는 친절하게도 그의 아버지를 경찰로 설정하는 치밀함도 빼놓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린타로가 공권력에 밖에 있기 때문에 자유인으로서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가 있었던 건 아닐까?

노리즈키 린타로 작가는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엘러리 퀸의 스타일대로,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많은 공을 들인다. 특히 린타로가 도모토 슌에게 허를 찔리고, 내연녀 사야카의 거짓말에 휘둘리며, 우사미 쇼진의 드라이아이스라는 전문적 지식을 동원한 공갈에 속는 장면에서는 주인공 역시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셜록 홈즈 같이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추리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점이 오히려 친근하게 다가온다. 적당히 용의자들에게 뻥을 치기도 하고, 정보원에게 허세를 부리기도 하는 인간적인 매력이 노리즈키 린타로의 소설에 재미를 더해 준다.

2005년에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에 오를 정도로 탄탄한 구성과 복선 그리고 주인공의 탁월한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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