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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기 구겐하임 자서전 - 어느 미술 중독자의 고백
페기 구겐하임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인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뉴욕 5번가에 있는 구겐하임 뮤지엄에 갔었던 게 언제였더라. 하도 오래전 일이라 이젠 다 기억이 나질 않지만, 센트럴 파크 옆길을 따라 5번가로 길을 물어물어 향하면서 저 멀리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했다는 구겐하임 뮤지엄의 자태를 보았을 때의 그 감동이란! 2010년 새해에 다시 구겐하임과 만날 수가 있었다. 물론, 내가 사랑하는 구겐하임 뮤지엄의 주인공 솔로몬 구겐하임이 아닌 그녀의 조카 페기 구겐하임의 자서전이었다.
19세기 말에 태어난 페기 구겐하임은 영어 표현에 나오는 그야말로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그런 인물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구겐하임 친가와 셀리그먼 외가라는 신대륙을 대표적인 가문끼리의 결합이었다. 특히, 셀리그먼 가문은 남북전쟁 당시 군복장사로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뉴욕 출신의 페기는 어려서부터 프랑스 출신 가정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하지만, 1912년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의 침몰로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가문의 유산으로 풍족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구겐하임 패밀리의 자산은 훗날 그녀가 미술품을 수집하고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원천이 된다.
첫 남편 로렌스 베일과의 7년간의 결혼생활을 통해, 그녀는 20세기 지식인 사회에 합류할 수가 있었다. 페기 구겐하임은 거의 40대가 다 되어서, 허버트 리드 경과의 교류와 특히, 그녀의 멘터라고 할 수 있는 마르셀 뒤샹의 도움과 충고로 현대 미술을 배우게 되고 본격적으로 미술가들과의 교류에 나서게 된다.
이후 그녀의 삶은 마치 21세기 현대미술,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녀가 시작한 구겐하임 죈의 첫 전시회는 프랑스 출신의 장 콕토에게 그 기회가 주어졌다. 한편, 그녀는 유명 작가인 사뮈엘 베케트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제임스 조이스, 칸딘스키, 이브 탕기 그리고 조각가 브랑쿠시 같은 당대를 주름잡던 인물들의 이름만으로도 정신이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예술가들과 교류를 하고, 본격적으로 예술품 수집을 하려던 찰나에 바로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말았다.
히틀러의 나치군이 파리를 점령하기에 앞서,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향하기에 이른 그녀는 이번에는 자신보다 훨씬 연상의 막스 에른스트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의 미국행을 도와 그녀는 미국을 떠나 유럽에 둥지를 튼 지 14년 만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막스 에른스트와의 두 번째 결혼 역시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파경을 맞게 된다. 그녀는 <금세기 미술 화랑> 활동에 전념하면서, 미국 현대미술을 대표하게 될 잭슨 폴록을 발굴하고 후원한다.
전후 이번에는 베네치아로 자신의 활동 무대를 옮겨 베네치아 비엔날레를 통해 현대미술의 전도사라는 별명에 걸맞은 활동을 보여준다. 이 책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은 그녀의 자서전답게 다른 전기 작가의 말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하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 어느 부유한 유한마담의 예술애호기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예술에 대한 진정한 그녀의 사랑을 알게 되면서 나의 삐뚤어진 시선이 조금 교정되는 것을 체험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잭슨 폴록과의 애증에 얽힌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풀어내 놓는 그녀의 이야기가 참 재밌게 다가왔다. 특히 내가 아는 미국 작가 트루먼 캐포티의 중재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다.
미술품 구매를 위해 전 세계를 누비는 그녀의 뜨거운 열정은 미국이나 유럽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스리랑카와 인도까지 가서 예술품을 구입하는 그녀의 노고에 정말 박수에 보내고 싶어졌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과연 페기 구겐하임을 예술품을 사들이면서 어떤 기준을 가졌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한 예술가들과의 교류가 만남, 교제, 갈등 그리고 화해라는 순환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이 순환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두 번째 남편 막스 에른스트와의 화해였다!
나는 여전히 그 깊이와 해석에 자신이 없는 현대미술보다는 미켈란젤로 같은 고전 미술에 더 많은 관심이 있는 한 명의 미술애호가이긴 하지만, 예술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현대미술의 가치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싶다. 물론, 페기처럼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할 수는 없을지라도 말이다.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멋진 활동을 보여 주었던 멋진 미술 중독자의 고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