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을유세계문학전집 17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김현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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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당혹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 우리나라에서 이젠 이런 종류의 책들도 나오는 건가? 하도 뉴라이트라는 사이비 단체들이 준동하다 보니 당연히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책을 집어 들어, 살펴보니 나의 그런 걱정은 기우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챌 수가 있었다. 우려한 대로 나치 문학을 찬양하거나 기록으로 다룬 책이 아니라 전혀 그 반대의 성격이었다! 칠레 출신의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가 실재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나라들에서 있었음직한 일들을 가공의 인물들에 자신만의 독특한 아우라가 어우러지는 블랙 유머를 가미해서 창작해낸 멋진 소설이었다.

칠레 출신으로 삶의 대부분을 멕시코와 스페인에서 보냈다는 로베르토 볼라뇨는, 20세였던 1973년 자신의 조국 칠레로 돌아간다. 한 때 트로츠키주의자이었고,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지지자였던 볼라뇨는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부 쿠데타로 아옌데 정부가 실각하면서 8일간의 감금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멕시코로 돌아갔다고 한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 정부를 연상케 하는 칠레의 파시스트 군부가 적법한 선거에 의해 구성된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부를 몰락시키는 장면을 현장에서 본 볼라뇨의 심정은 어땠을까?

특히 라틴 아메리카는 2차 세계대전 후, 나치 전범들의 천국이 아니었던가. 실제로 나치 전범이었던 아이히만과 멩겔레가 남미에서 도피생활은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전후 거의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파시스트 군부 독재가 횡행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 같다. 심지어는 파시스트 우익들의 우상인 히틀러가, 1945년 베를린 포위전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남미에서 제4제국을 세우려 했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현상의 비꼬기를 아주 좋아한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로베르토 볼라뇨의 책의 중심에는 역사인물사전 양식을 취하면서, 가공의 30명의 시인, 소설가 그리고 편집자를(모두 나치거나 혹은 극우주의자들) 희화화하고 조롱하는 비꼬기가 자리 잡고 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유력한 가문 출신의 여류작가는 어려서 히틀러와 같이 찍은 사진을 그야말로 신줏단지 모시듯이 한다. 콜롬비아 출신의 열혈 우익 청년작가들은 아예 히틀러의 SS 의용사단에 적을 두고, 아리안 전사로써 소련과 대결했던 동부전선에서 활약상을 그리고 있다. 샤를마뉴 사단이나 혹은 아르덴 전투에서 명성을 날린 파이퍼 여단 등에 대한 언급은 작가의 뛰어난 역사적 통찰력을 선보여 주고 있었다.

멕시코 출신의 여성지식인은 자신의 신념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남자와 만나 평생을 지지고 볶는 삶을 산다. 숱한 이별과 재결합을 반복한 그들이, 파시스트 프랑코가 마드리드를 폭격하던 순간 손버릇이 고약한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폭행하는 것은 희비극의 극치였다. 아이티 출신으로 도저히 작가라고 부를 수 없었던 막스 미르발레의 상상을 초월하는 표절 행각의 행진 앞에서는 폭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꼴통들의 행진에 미국 출신 인사들도 빠질 수가 없었으니, 강철 도시(피츠버그) 출신의 얼치기 시인 로리 롱은 종교적 투신을 통해 사이비 종교의 교주로 활약하면서 인종차별적인 언사를 남발하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로버트 해리스의 <당신들의 조국>의 플롯을 연상시키는 미국 버지니아 출신의 작가 해리 시벨리우스의 <욥의 친아들>은 나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유럽전에서 승리하고 일본과 함께 미국을 협공해서 마침내 전 세계를 제패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소설을 지어낸다.

이 책을 읽으면서 히틀러의 제3제국과 라틴 아메리카 독재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롤모델로 삼았던 스페인의 파시스트 독재자 프랑코의 망령을 곳곳에서 볼 수가 있었다.

2003년 간질환으로 50세에 자신의 커리어 정점에서 삶의 방점을 찍어 버린 로베르토 볼라뇨는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을 통해, 자신의 뛰어난 글쓰기의 창조적 재능을 보여 주고 있다. 물경 30명에 달하는 다양한 파시스트 인물들을 창조해낸 것도 그렇지만, 책의 뒷부분에 달아 놓은 에필로그와 단행본 등의 저서에서 보이는 정교함은 정말 대단했다. 게다가 볼라뇨는 이 책의 소재로 나치 문학과 그 문학을 창조한 작가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전후 프랑스의 숙청과정에서도 보이듯이 인간의 영혼에 관계하는 문학의 중요성에 대한 메타포로 작용하고 있다.

책의 곳곳에서 그의 블랙 유머와 비꼬기가 작렬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로베르토 볼라뇨는 다소 냉소적이긴 하지만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그의 블랙 유머가 빛나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평생을 나그네로 살았던 칠레의 작가는 우리의 곁을 떠나 영면의 방랑에 들어갔지만, 그가 창조해낸 멋진 작품을 뒤늦게나마 만날 수 있게 돼서 너무나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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