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천 가족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4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2002년 여름, 처음으로 일본의 천년고도 교토를 찾았다. 열흘간의 간사이 지방 여행에서 나는 특히 교토를 만끽할 수가 있었다. 그 좋다는 교토의 벚꽃 지는 계절을 못 보아서 그런진 몰라도 지금도 벚꽃이 질 무렵이면, 교토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최근에 그런 교토에 대한 나의 그리움에 불을 싸지른 책이 있으니 바로 모리미 도미히코 작가의 <유정천 가족>이 그 주인공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너구리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너구리를 주인공으로 삼았을까? 고집스레 교토의 거리를 공간적으로 배경으로 한 일련의 작품들을 꾸준하게 발표하는 교토 대학 출신의 도리미 도미히코 작가는 “판타지 가족 소설”이라는 틀에, 둔갑술에 능하고 거의 인간처럼 묘사되는 너구리들이 아마 자신의 소설에 주인공으로 제격이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유정천 가족>에는 주인공인 너구리, 인간 그리고 텐구라는 세 부류의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아카다마 포트와인을 즐기는 아카다마 선생(텐구)을 필두로 해서, 선생이 흠모해 마지 않는 아름다운 미모의 벤텐(인간) 그리고 시모가모 너구리 일족이 나온다. 실질적인 주인공은 시모가모 집안의 삼남 야사부로로 훌륭하게 바보의 피를 이어받아, 엉뚱하고 기발한 장난을 치는 데 있어 따를 너구리가 없다. 둔갑술은 말할 것도 없고. 아울러 악당 너구리들로 등장하는 에비스가와 집안의 멍청이 금각, 은각 형제 역시 <유정천 가족>에서 슬랙스틱 코미디에 어울릴 법한 사이드킥으로서의 역할을 멋지게 해내고 있다.

한편, 교토의 다다스 숲에 평화롭게 은거하며 사는 시모가모 너구리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아버지로 위대했던 너구리 시모가모 소이치로가 흉악한 인간들의 모임인 금요구락부의 송년 모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쇠 냄비요리의 재료로 잡혀먹혔다는 끔찍한 사실이다. 그런 연유로 야사부로의 작은형 야지로는 우물 속의 개구리로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고, 소이치로의 자식들은 모두 변변치 못하다는 세간의 평을 듣고 산다.

너구리들의 지도자인 차기 니에세몬 자리를 두고 경합을 벌이던 야사부로의 큰형 아이치로와 악당의 면모를 유감없이 갖춘 그들의 작은아버지 에비스가와 소운의 대결이 그야말로 불을 뿜는다. 에비스가와들의 음모에 맞서 과연, 시모가모 너구리들은 예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지. 천년고도 교토를 무대로 한 너구리들의 대혈투가 벌어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오래전에 본 애니메이션 영화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래의 전승설화나 민담에서 너구리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인데, 일본에서는 우리와 달리 거의 모든 형태의 둔갑이 가능한 너구리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인기를 끄는 모양이다. 현 일본 국왕이 너구리에 대한 논문을 집필할 정도면 말이다. 모리미 도미히코 작가도 바로 그런 점에 착안해서, 너구리 삼부작의 효시로 <유정천 가족>을 발표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을 해본다.

곳곳에 등장하는 ‘매우 진한 바보의 피’를 이어받은 너구리들의 좌충우돌 이야기와, 가장을 잃은 시모가모 너구리들이 홀로 남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험한 세파를 헤쳐나가는 모습에서 작가가 의도했던 “판타지 가족 소설”의 원형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소설에 나오는 주술적 리얼리즘을 배제하고, 너구리들의 자리에 인간을 대입시켜 보면 우리네 던적스러운 살이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말이다.

사실 책 표지의 일러스트에서 이미 소설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 주고 있다. 시모가모네 둘째인 개구리 야지로가 변신한 가짜 에이잔 전철에 엄마, 야이치로, 주인공 야사부로 그리고 야시로가 탑승해 있다. 가짜 전철의 뒤편에는 너구리들의 영원한 스승 아카다마 선생과 선생의 애제자인 아리따운 벤텐이 한 칸을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게다가 야사부로는 결말 부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아카다마 선생의 바람신 천둥신의 부채도 오른손에 쥐고 있지 않은가! 말이 필요 없다, 이보다 더 멋진 표지는 아마 없을 것 같다.

<유정천 가족>은 모리미 도미히코 작가의 너구리 삼부작 중에 첫 편이라고 하는데, 과연 다음에 나올 차기작에서는 과연 어떤 너구리들의 이야기가 펼쳐질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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