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
마르크 함싱크 지음, 이수영 옮김 / 문이당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의 띠지에 당당하게 거론된 “사도세자는 뒤주에서 죽지 않았다”라는 선언과 영조 말 삼정승의 자살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정도만으로도 이 책이 다루는 시기가 언제라는 것 정도는 짐작했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이 책의 저자가 한국인이 될 뻔한 외국인 마르크 함싱크라는 벨기에 사람이 저술한 책이라는 점이다. 네덜란드 말로 쓰인 이 책이 얼마나 조선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가는 책을 읽어 보면 단박에 알 수가 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좀 필요할 것 같다. 조선은 군왕이 지배하는 왕조국가였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이래 왕권을 주장하는 군왕과 신권을 주장하는 신료들의 대결은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색당파라는 노론, 소론, 북인, 남인으로 나누어져 격렬한 정치투쟁을 벌이던 사대부들은 영조 대에 들어오면서 노론이 왕을 보위하면서 주도권을 잡기에 이른다. 우리에게는 당쟁을 혁파한 탕평책으로 유명한 영조 역시 자신이 왕권을 유지하는 데 혁혁한 공헌을 한 보수파 노론을 좌시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숙종의 아들로, 형인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영조는 경종 독살설과 서자로 왕위에 오른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바로 이 시기에, 조선 왕조 역사상 최악의 참극의 주인공이었던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250년 전 미스터리의 세계로 마르크 함싱어는 독자들을 안내한다.

소설은 <충신>의 실제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문원(영조 시대 영의정을 지낸 이천보의 양자)이 시대가 바뀐 정조 치세에 20년 전의 끔찍한 사건을 떠올리는 플래시백으로 시작된다. 갖은 기행으로 영조의 눈 밖에 난 사도세자를 보위하는 세 명의 정승 이천보, 이후 그리고 민백상이 어느 내의원의 고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영상 이천보의 아들인 이문원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자신의 친구들인 조일천과 서영우와 더불어 문제의 내의원을 찾아 나선다. 세 명의 정승, 세 명의 친구들 어째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서구 문명의 기원을 이루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차치하고서라도, 당장에 프랑스 출신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가 떠올랐다.

그들이 찾던 내의원 장의삼이 의문사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이문원과 친구들은 제각각 가진 재주 의술과 무술을 바탕으로 사건의 중심 속으로 뛰어든다. 한낱 내의원의 죽음이, 차기 왕권을 목표로 한 죽음도 불사하는 정권투쟁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사도세자를 무사히 지켜 영조의 대를 이어 차기 군왕으로 삼으려는 세 명의 충신들과 그들의 의도를 저지하려는 영조의 왕비 정순왕후와 화완옹주 그리고 노론세력 간의 암투가 시작된다.

역시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한 서구식 팩션의 얼개가 살짝 얼비쳤다. 미스터리물에서 살인사건만큼 독자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소재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왕실의 후사가 관련된 음모라면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소설에서 이문원 일행이 죽은 내의원의 사인을 규명하고, 동래상단이 발행한 어음을 추적하는 과정은 오늘날 CSI 부검이나 계좌추적을 떠올렸다. 과연 그 당시에도 그런 과정이 있었는지를 떠나, 현대판 퓨전 사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아마 최근에 사극을 너무 많이 본 탓으로 해두자.

공맹 사상의 바탕을 이루는 충효 이데올로기의 발현은 솔직히 말해서 감동적이다.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유교적 교육 시스템의 잔향이 아직도 몸에 남아 있는 탓인지 여전히 유효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21세기 새로운 “충신”의 모습은 마르크 함싱어가 쓴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리더에게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보좌관의 용기야말로 새로운 시대 리더십에 필요한 충(忠)이 아닐까. 군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가문의 안위를 걱정하는 삼정승의 모습이 오히려 더 인간적이었다고나 할까.

뭐니뭐니해도 정말 놀라운 건, 이 역사소설 <충신>을 외국인 마르크 함싱어가 썼다는 점이다. 그것은 마치 한국 사람이 중세 피렌체를 배경으로 해서 마키아벨리를 주인공으로 한 팩션을 쓴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정말 다양한 언어의 구사력과 시대 연구가 병행하지 않으면 불가능했을 글쓰기를 작가가 완수해낸 것에 대해 찬탄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동시에 국내에서도 마르크 함싱어의 팩션에 필적할 만한 역사소설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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