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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기행
후지와라 신야 지음, 김욱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전 세계를 누비는 일본 출신의 방랑객 후지와라 신야가 이번에는 현대판 자본주의 천국, 미국을 찾았다. 지난 1년 동안 만난 후지와라 신야의 세 번째 책이다. 광물의 세계인 중근동과 티베트, 인도 그리고 식물의 세계인 미얀마를 비롯한 동남아를 누비며 그 안에 사는 이들에 대해 쓴 에세이가 참 마음에 들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80년대가 저물어 하던 즈음에 후지와라 신야는 팍스 아메리카나가 절정이었던 미국의 곳곳을 여행하며 쓴 에세이에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들이 들어 있을지 기대가 됐다.
현대 문명의 편리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고속도로와 자동차의 나라 미국을 여행하기 위해 작가는 서부시대의 포장마차를 연상시키는 모터홈으로 서부에서 동부 또 다시 서부로 돌아오는 200여 일 그리고 2만 마일에 달하는 대장정에 오른다. 책을 읽다 보니 그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럼 과연 그 수많은 이야기는 어떻게 기록을 했는지 궁금하다. 물론 사진을 많이 찍었을 테니 포토 에세이 식의 글쓰기였을까?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빨라진다.
후지와라 신야가 미국을 특징짓는 세 가지 요소 중에 가장 첫 번째로 꼽은 가상현실의 본산 할리우드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미국인들은 슈퍼맨이나 람보와 같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허상)에 의한 스타 시스템에 환호하고, 자신이 미래에 추구하는 성공의 모습을 그리며 희열을 느낀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존재하지 않는 모습들이 텔레비전과 영화 같은 미디어를 통해 재생산되고 확대된다. 이렇게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대중에 의해 두 번째 미국적 요소인 대량생산-대량소비의 과정을 거쳐, 마지막으로 유아적 쾌감원칙을 충족시키게 된다. 하지만, 삶에 있어 기갈과 허기는 채워지지 않는다. 물질적으로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은 아메리카가 빠진 덫이라고나 할까.
한편, 역사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진 미국인들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다. 유럽을 그 뿌리로 하는 미국인들에게 과거는 단절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비춰진다. 동시에 역설적으로 뉴잉글랜드, 뉴햄프셔, 뉴헤이븐 같은 구대륙의 지명들이 신세계의 도시 이름으로 부활하기도 한다. 유럽에서 모두 다른 양식으로 지은 가옥과 달리 신대륙에서는 효율성을 모토로 해서 투바이포 양식의 붕어빵 틀로 찍어낸 듯한 천편일률적인 가옥구조가 일반화된다. 작가에 의하면 이런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은 다인종 국가인 미국에서 인위적인 통합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이런 심리적 기제들은 그네들의 모습에서 지구 상의 그 어느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친근함과 더불어 따라오는 냉정함이라는 복합적인 양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자연의 축복을 받은 캘리포니아를 떠나 네바다 사막을 가로지르며, 1969년 인간의 달착륙 당시 인류사의 위대한 발자취로 칭송받았던 대사건이 지구의 반대편 이란에서는 자신들의 이상 세계를 훼손시킨 절대 악으로 폄하되는 장면을 떠올리기도 한다. 달랑 10센트의 고속도로 요금을 받는 곳에서 일하는 여인에 대한 연민을 스케치하기도 하고, 밀레니엄 캐피탈이라고 불리는 뉴욕에서는 경찰 권력에 의해 행해지는 인종차별적 폭력을 목격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후지와라 신야 작가가 기술한 많은 미국 문명 비판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 세 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마이클 잭슨, 맥도널드 그리고 미키마우스를 선정하고 싶다. 시대의 아이콘으로 쾌락의 원천을 제공했던 마이클 잭슨의 비극적인 죽음은 단지 어느 유명인사 혹은 스타의 죽음으로 수용되지 않는다. 후자와라 신야가 네바다 사막에서 미래 인류의 모습을 보았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지난 반세기 동안 전 세계 주도권을 장악하고 경찰국가로서 패권을 자랑해온 어느 몰락하는 제국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마이클 잭슨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성형중독에 일조한 콜라의 거품처럼, 미국식 편리함의 상징이었던 맥도널드의 몰락에 대한 작가의 분석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뉴욕 외곽의 D타운에서 작가가 직접 경험한 타인으로서의 모멸감은 충분히 공감이 갔다. 서부시대 전통을 잇는 셀프서비스로 무장한 맥도널드는 오늘날 비만의 주범으로 몰리면서 하루가 다르게 그 위상을 잃어가고 있다. 더 자세한 맥도널드의 폐해에 알고 싶은 이들에게 모건 스펄록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슈퍼사이즈 미>를 추천해 주고 싶다.
미국의 대통령이 누구인지도 몰라도 디즈니의 캐릭터 미키마우스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국식 박애주의와 이방인 나아가서는 구대륙에서 페스트의 원흉으로 손가락질 받던 시궁쥐 미키마우스는 신세계 미국에서 어린이들과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유아적 쾌락을 쫓는 성인들의 절친한 친구로 환골탈태하게 된다.
<아메리카 기행>은 어쩌면 독자들이 기대한 미국 여행과 문물에 대한 에세이와는 조금 거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신 미국식 자본주의와 가상현실에 기초한 미국 문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돋보인다. 계속해서 이동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인지, 그네들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보다는 조금은 피상적이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 정도야 방랑객에 대한 예우로 너그럽게 이해해 주고 싶다. 한 가지 아쉬운 점으로 작가가 모터홈 여행을 하면서 분명히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찍었을 텐데, 초반에 나오는 사진 말고는 사진 구경을 할 수 없다는 점과 수록된 사진마저 설명이 없다는 점을 꼽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천하의 방랑객 후지와라 신야가 <일본 열도 기행>을 쓴다면 과연 어떤 글들이 실릴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