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의 실종
안드레이 쿠르코프 지음, 양민종 옮김 / 솔출판사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지난 주말에 텔레비전에 하는 우크라이나 기행이라는 프로그램을 볼 수가 있었다. 내가 보기 시작한 부분은 예전에 소피아 로렌 주연의 <해바라기>의 배경이 되었던 폴타바라는 곳으로, 엄청나게 광활한 평원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1970년에 제작된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980년대로, 그동안 공산권 국가였던 소련을 상징하는 “해바라기”라는 꽃 때문에 우리나라 상륙이 불허되고 있었다고 했던가. 그냥 화초로만 알았던 해바라기가 우크라이나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작물이라는 사실을 이 프로그램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 막 읽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를 배경으로 해서 펼쳐지는 안드레이 쿠르코프의 <펭귄의 실종>이 떠올랐다.

전편 <펭귄의 우울>을 읽자마자 후속편인 <펭귄의 실종>을 읽고 싶어서 한동안 몸살이 다 날 지경이었다.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집단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은 주인공 빅토르 졸로따례프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지, 그리고 후속편의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심장수술을 받은 펭귄 미샤가 없어졌다고 하는데 과연 빅토르는 미샤를 찾을 수 있을지 점증하는 의문점들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온라인으로 주문을 한 책은 내 손안에 들어오는데 자그마치 4일이나 걸렸다. 참다못해 결국 온라인 미리 보기 서비스를 이용해서 몇 장이나마 컴퓨터로 읽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책을 받자마자 600쪽이 넘는 분량을 단숨에 읽어 버렸다. 전작 <펭귄의 우울>에서 빅토르와 펭귄 미샤 그리고 소냐의 관계가 위태롭긴 했지만 잔잔하게 전개가 있었다면, 후속편 <펭귄의 실종>에서는 펭귄 미샤를 구하기 위한 빅토르의 눈물겨운, 때로는 목숨을 건 모험이 그야말로 소용돌이친다.

남극에서 우연히 만난 브로니코프스키의 도움과 부탁으로 다시 키예프로 돌아온 빅토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한 때 유사가족이라고 생각했던 니나의 배신과 펭귄 미샤의 실종이었다. 사실, 전자보다 후자의 사건에 더 충격을 받은 빅토르는 곧바로 미샤의 수배에 나선다. 그가 접한 펭귄 미샤의 소식은 러시아 마피아의 손에 이끌려 모스크바로 끌려갔다고 하는 비보였다. 그 와중에 그는 달팽이 이론을 설파하는 세르게이 파블로비치라는 미래의 국회의원 지망생을 후원자로 두게 된다. 전작에서 수도뉴스의 편집장 이고르 르보비치의 역할이 새로운 캐릭터에게 전이되는 순간이었다.

모스크바에 간 빅토르는 브로니코프스키의 미망인(놀랍게도 한국계 여성이었다!)과 짧은 로맨스를 뒤로하고, 펭귄 미샤를 구하기 위해 전쟁통인 체첸으로 발길을 돌린다. <펭귄의 우울>이 우크라이나 그것도 키예프라는 도시에 한정적이었다면, <펭귄의 실종>에서는 우크라이나-모스크바 그리고 체첸을 아우르는 광대한 스케일을 그 무대로 한다. 펭귄 미샤를 구하기 위해, 자청해서 노예가 된 빅토르는 자의와는 관계없이 화장장에서 일하게 된다. 죽음의 교역이 이루어지는 화장장에서 러시아 연방군과 체첸인들 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이런 삶과 죽음이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밖에 되지 않는 곳에서 과연 빅토르는 펭귄 미샤를 찾게 될 것인가? 과연 그들의 운명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작가 안드레이 쿠르코프는 미스터리 스릴러 초대장을 독자들에게 발부한다.

책을 읽으면서, 러시아 내부에 은연중에 작동하는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 그림자를 느낄 수가 있었다. 나중에 빅토르가 다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게 되면서, 죽은 세르게이의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했을 때 보이는 보스의 반응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침공군의 뒤를 따라 우크라이나 지역에 침입했던 나치 학살부대 “아인자츠그루펜”의 활약이 그 어느 곳보다 왕성했던 곳이 바로 우크라이나가 아니었던가.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에 쇠락해 버린 것처럼 보였던 범슬라브주의에 대한 향수도 주된 키워드로 다가왔다.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체첸공화국 그리고 아드리아 해의 크로아티아에 이르기까지 빅토르가 누비는 곳은 모두 옛 공산주의 소비에트 시절의 영광에 대한 아쉬움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그 누가 뭐래도, 우리가 남이가? 라는 슬라브 민족의 동질성이랄까. 한편, 과거로부터의 해방된 자유를 만끽하는 그네들의 이중적인 모습들도 동시에 찾아볼 수가 있었다. 바로 그 분절점에 우리의 주인공 빅토르와 펭귄 미샤가 자리 잡고 있는 건 아닐까!

소설을 관통하는 또 다른 키워드로는 “약속”을 꼽고 싶다. 펭귄 미샤를 풀어주겠다는 체첸 갱단 두목 하차예프의 약속 그리고 무엇보다 펭귄 미샤를 남극에 보내겠다는 빅토르의 신념에 찬 약속은 소설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다. 물론 펭귄 미샤를 구하는 일이 과연 자신의 목숨을 걸만한 일인가에 대한 의문은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인공 빅토르 개인의 관계 결핍을 채우는 펭귄 미샤의 존재는, 유사가족 니나의 무존재 함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어느 한 작가의 글을 읽고 나서, 그 나라의 현대문학을 이야기한다는 게 무리일 것이다. 그래도 러시아 현대문학 작가 중에서 나름대로 대중성을 확보한 안드레이 쿠르코프의 펭귄 시리즈를 통해, 고뇌하는 개인의 단면과 산적한 여러 문제에 대한 사회적 접근을 어느 정도나마 체험하고 이해한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이 느껴졌다. 안드레이 쿠르코프 작가의 다른 작품들의 출간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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