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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텔 라이프
윌리 블로틴 지음, 신선해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끼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지도에서 책에 나오는 위치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구글 맵을 이용해 보니, 윌리 블로틴이 쓴 <모텔 라이프>의 주인공들인 플래니건 형제들의 여정을 짚어낼 수가 있었다. 그들의 본거지인 네바다 주 리노 시를 가로지르는 80번 고속도로가 한 눈에 척하니 들어왔다.
뮤지션이자 자신의 데뷔 소설로 <모텔 라이프>를 발표한 윌리 블로틴은 미국 네바다 주의 리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두 명의 주인공은 프랭크 플래니건과 제리 리 플래니건 형제다. 혹자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을 실제 저자들과 혼동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말하는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작가 윌리 블로틴이 프랭크고, 이야기의 시작마다 일러스트를 그린 네이트 비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소설은 충격으로 시작한다. 실제로 소설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인 프랭크의 형인 제리 리가 어느 날, 술에 취해 운전하던 중에 갑자기 도로로 뛰어든 웨스 데니라는 소년을 치어 죽이면서 플래니건 형제들의 운명의 수레바퀴는 급회전하기 시작한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한 제리 리는 그 소년을 차에 실은 후, 도주해 버린다. 첫 실수로 잘못 꿰어진 단추는 제리 리의 동생인 프랭크마저 도망자로 만든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플래니건 형제들의 매우 곤란한 삶의 원형들이 속속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도박 중독에 빠져, 결국 가정을 떠나 버린 아버지로부터 시작해서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해서 그들이 모텔이라는 뜨내기들이 머무는 곳에 보금자리를 틀게 되었는지의 과정들이 플래시처럼 사이사이에 끼어든다.
그들의 로드트립은 제리 리의 갑작스러운 변심 탓에, 어디에선가 갑자기 끝나 버리고 프랭크는 다시 리노로 돌아오게 된다. 마음 둘 곳 없는 천국보다 낯선 리노지만, 그네들의 마음속에는 다시 돌아오게 되고야 마는 삶의 회전축처럼 작동하고 있다. 소년을 죽였다는 자책감에 제리 리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마저 실패하고 다시 병원에 갇히게 된다.
형제끼리 서로 의지하고, 도우면서 살라는 어머니의 유언대로 프랭크는 온 힘을 다해 제리 리를 돕는다. 한편, 삶에 대한 어떤 희망도 없이, 그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프랭크는 자신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었던 애니 제임스와의 가슴 아픈 과거로 괴로워한다. 과연, 플래니건 형제들은 과거의 트라우마들을 딛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
<모텔 라이프>는 자동차 문화가 그 어느 나라보다 발달한 미국의 모텔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마치 디지털 시대의 유목민들처럼 한 주 혹은 한 달씩 머무는 유목민들의 공간인 모텔을 전전하는 프랭크와 제리 리의 이야기는, 부모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이별로 말미암아 마음의 안식처를 잃어버린 영혼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모텔에서 쉬고 먹고 자면서, 사랑을 하고 성장해 나간다. 독자들은 책을 읽을수록, 정상적으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탈적인 삶을 사는 플래니건 형제들의 삶의 모습에 점점 더 수긍하게 된다.
제리 리에게 프랭크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미국 대중문화에 대한 오마쥬로 다가온다. 정말 황당무계한 이야기들로 들리는 프랭크의 이야기는 모두 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들의 줄거리에 자신과 제리 리가 아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당하게 붙여서 만들어낸 이야기들이다. 가령 예를 들어, 마지막 이야기에서 얼음처럼 찬 아이슬란드에 불시착한 프랭크가 북극곰을 죽이고, 그 속에 들어가 살아남는다는 이야기는 <스타워즈: 제국의 역습> 초반부에 루크 스카이워커의 생존전략을 그대도 베꼈다.
작가 윌리 블로틴은 <모텔 라이프>를 통해 독자들에게 미국 하위문화를 여과 없이 소개하고 있다. 그들이 끼니를 때우는 싸구려 레스토랑, 사교의 장으로 나오는 동네 술집, 여행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가 남긴 총을 파는 총포상, 그리고 도로를 달리기 위해 필요한 중고차를 매매하는 중고차 딜러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통 사람들 일상의 모습이다.
소설을 읽던 중에 용서와 화해라는 단어들이 불쑥 솟아난다. 자신이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애니 제임스와의 사건을 곱씹던, 프랭크는 결국 병원에서 형 제리 리를 데리고 일생일대의 도박을 벌여 그렇게 딴 돈으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 나선다. 결국, 프랭크가 돌아갈 마음의 안식처는 바로 자신의 첫사랑이었을까. 형제간의 어처구니없는 배신은 논외의 문제다. 프랭크는 그렇게 자신이 풀어야 하는 본질적 화해를 향해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모텔 라이프>는 영화로 만들어도 좋다 싶을 정도로 개별적인 에피소드들과 플래시백들의 사용이 장마다 적절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영화 판권이 팔렸다고 한다. 로드 버디 무비라는 장르가 있듯이, 영화화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윌리 블로틴이 어느 모텔에서 직접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동영상을 보게 됐다. <모든 것이 중요해지는 순간>의 작가 론 커리는 자신의 소설을 쓰기 위해, 미국 중서부 지역의 싸구려 식당에서 직접 감자 튀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윌리 블로틴 역시 그랬던 걸까. 내년에 그의 신작이 나온다고 하는데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