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품절


언제나 그렇지만,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는건 즐거움이다. 지금 막 다 읽은 루이스 세풀베다의 세 번째 장편소설 <귀향> 역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소재에 느와르 형식의 추리소설의 포맷이어서 그런지 그 재미가 갑절이 되었다.

올해 처음으로 만나게 된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들은 새로운 천년 들어와서 출간 붐을 탔다가 현재는 정체됐다. 그 결과, 예의 출간시기보다 뒤늦게 작가의 진가를 알고서 부랴부랴 절판된 책들을 구해보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읽었던 <감상적 킬러의 고백> 그리고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 모두 절판된 책들이었다. <귀향> 역시 마찬가지여서, 이번에는 도서관을 이용해서 만날 수가 있었다.

세풀베다의 책을 읽고, 작가에 대한 궁금증으로 인터넷을 통해 그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치 않다. 그의 글들은 자연친화적인 환경을 다룬 소설과 흑색 소설의 두 장르로 크게 나뉘어진다고 하는데, <감상적 킬러의 고백>에 실린 두 개의 단편들이 각각의 장르에 걸친 작품이라고 한다면,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는 후자 쪽에 그리고 <귀향> 역시 흑색 소설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책의 서두와 말미에 작가의 언급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귀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3제국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1941년, 히틀러의 나치즘과 인종차별주의에 환멸을 느낀 두 명의 경찰 한스 힐러만과 울리히 헬름은 조국을 떠나 밀항할 궁리를 한다. 때마침 그들이 경비를 서던 나치 친위대의 창고에서 63개의 금화를 훔쳐, 종적을 감춘다. 하지만 울리히 헬름은 막판에 나치 게슈타포에게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하반신 불수가 되고, 러시아군의 포로가 된다. 그리고 동독 체제 아래서 다시 비밀경찰 슈타지에게 협박과 취조를 당하지만, 자신의 동료 한스에 대해 함구하는 의리남의 모습을 지킨다.

세월은 흘러, 반세기가 지나 독일을 둘로 갈라놓았던 장벽이 걷히고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가 승리가 가시화되면서 히틀러 시절에 사라진 보물에 대한 추격이 다시 시작된다. 자, 이제 세풀베다는 주인공으로 전직 게릴라 출신의 로맨티스트 후안 벨몬테(헤밍웨이의 작품에 나오는 저명한 투우사의 이름이라고 한다)를 등장시킨다.

칠레 출신으로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 망명객의 신분으로 프롤레타리아들의 계급적 갈등이 터져 나오는 곳에 어김없이 출현했던 벨몬테는 독일 함부르크 유흥가 스크립클럽의 기도로 전락해 있다. 이렇게 유능한 전사를 그냥 둘 리가 없는 세상은 한제아틱 로이즈라는 보험회사의 오스카 크라머라는 정체불명의 캐릭터를 통해 속세로 소환시킨다. 물론 아무런 대가 없이, 사라진 이븐 바투타의 금화를 찾아오라는 설정은 말이 되지 않는다. 역시 군사독재의 희생자인 연인 베로니카를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벨몬테는 위험 속으로 뛰어든다.

그럼 이제 악당이 등장할 차례인가? 사라진 보물에 대해 아무런 근거 없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들로 구 동독 정보국 소속의 일단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독일 통일 이후, “중령”으로 불리는 이는 부동산 사업가로 변신해서 역시 후락한 삶을 살고 있는 프랑크 갈린스키에게 접귾해서 벨몬테와 유사한 임무를 맡긴다. 자, 이제 남아메리카의 불의 땅(티에라 델 푸에고)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잠적한 한스 힐러만, 이제는 프란츠 슈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미지의 인물을 찾는 숨막히는 질주가 시작된다.

<귀향>은 두 가지의 이야기가 교묘하게 얽혀 있다. 나치 시절 금화를 가지고 도주한 두 명의 반나치주의자들의 인생역정과, 칠레와 동독 출신 두 사나이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몰락이 중첩되고 있었다. 이 둘의 접점은 지구의 끝 “티에라 델 푸에고”, 다시 말해서 불의 땅이다. 특히 군사독재를 직접 체험한 망명객이자, 저명한 양키 작가 소설의 주인공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후안 벨몬테”는 루이스 세풀베다의 페르소나로 부활하고 있다. 과거를 잊고 살지만, 자신과 과거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으로 나오는 베로니카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로맨티스트의 단면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불의 땅, 티에라 델 푸에고는 어머니 대자연처럼 그 품에 안겨 사는 이들의 과거에 대해 관대하다. 그 어느 누구도, 지구의 끝자락에까지 와서 사는 이들에게 과거를 묻지 않는다. 모두가 이렇게 숨기고 싶어 하는 과거는 서로 상이한 캐릭터들의 접점을 유도해낸다.

한편 정치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군사독재 시절 고문과 실종이 빈번하게 자행되던 칠레의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작가의 냉소적인 시선들이 곳곳에서 읽히고 있었다. 여전히 과거사 청산이 되지 않은 이국의 땅이, 더 추악한 과거를 지닌 이들의 도피처로 이용되고 있는 역설적 상황이 전개된다. 세풀베다가 만들어내는 소설의 들줄과 씨줄은 복잡해 보인다. 하지만, 그 플롯의 다양성만큼은 해리슨 포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인디아나 존스>만큼이나 재밌고 흥미진진하다.

<귀향>의 원제는 <투우사의 이름>이라고 하는데, 번역되어 출간된 제목보다 확실히 원제에 더 호감이 간다. 도대체 누구의 “귀향”이란 말인가? 소설 가운데 어느 단편적인 사건에 포커스를 맞춘 듯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역시 있는 그대로가 더 좋다. 역시 대중성을 바탕으로 해서, 속독의 재미를 빚어내는 글의 연금술사답게 장르를 넘나드는 루이스 세풀베다구나 싶었다. 시간이 갈수록 자꾸만 그의 책들이 절판의 운명 속으로 잠겨 드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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