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적 킬러의 고백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품절


어느 책을 읽고 나서 서평을 쓰면서, 이렇게 설렜던 적이 있었던가? 그만큼 루이스 세풀베다의 <감상적 킬러의 고백>은 매력적이다. 그리고 올해 내가 읽은 최고의 책으로 꼽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노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다만, 무척이나 주관적이라는 생각을 먼저 말하고 싶다. 내가 이 책과 만나게 된 계기는 역시 책이었다. 얼마 전에 읽은 박주영 작가의 <백수생활백서>에서 이 세풀베다 책 제목을 듣는 순간, 운명적인 만남을 느꼈다고 해야 할까? 마누엘 푸익,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그리고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등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의 이름은 많이 들어 보았지만, 아쉽게도 루이스 세풀베다의 이름은 생소하기만 했다.

게다가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감상적 킬러의 고백>은 이미 절판되었다는 게 아닌가! 절판본에 대한 누구 못지않은 탐욕이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책을 입수하게 만들었다. 책을 손에 쥐자마자 바로 읽기 시작했다. 책날개에는 루이스 세풀베다에 대한 약력이 소개되어 있었다. 칠레 출신의 작가로, 악명 높은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 망명해서 독일과 스페인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린피스 활동가로도 활동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이제 본론에 들어가 보자. 우선 이 책은 두 개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타이틀인 <감상적 킬러의 고백>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악어>다. 우선 전자부터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감상적 킬러의 고백>은 말 그대로 킬러가 주인공이다. 의뢰인과 중개인으로부터 건네받은 사진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산 자들의 명부에서 지우는 “목숨을 앗아 가는 천사”라는 직업을 가진 킬러. 국적도 이름도 모르는 우리의 주인공 킬러는 40대 초반의 남자다. 어느 날처럼, 표적을 받은 그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그런 배후에는 최근 킬러가 만난 아리따운 프랑스 아가씨가 자리하고 있다. 킬러는 그녀를 평범한 소녀에서 세련된 여자로 만들어주었으면, 그들의 열렬한 사랑은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댄다, 조금은 냉철하고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일 것 같은 킬러의 본능에서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다. 망명객 작가 세풀베다는 독자들을 마드리드의 번화가에서, 이스탄불의 바자 시장으로 그리고 다시 프랑크푸르트와 파리의 도심으로 인도를 하고 마침내 이야기의 대단원의 막이 내려지는 후덕지근한 대도시 멕시코시티로 인도한다. 소설이라는 미디어에서 공간이동의 자유를 만끽한다.

플롯의 중심에는 익명성과 물질주의가 일란성 쌍둥이처럼 다가온다. 자신의 정체를 절대 밝히지 않는 킬러. 그의 의뢰인이나 중개인 역시 마찬가지다. 킬러는 절대 표적이 왜 산 자의 명부에서 지워져야 하는가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대하는 모든 것은 물질로 변이된다. 그의 표적은 살아 숨 쉬는 생명체가 아닌 세금도 따라 붙지 않는 여섯 자리 숫자가 찍힌 수표로 대체가 되고, 그의 ‘계집애’ 프랑스 아가씨 역시 욕구 해소의 도구일 뿐이지 애정이나 감성의 대상은 아니다. 문학가를 꿈꾸는 프랑스 아가씨의 용도 역시 얼마든지 대체될 수가 있다, 물론 금전적 대가를 치르면서 말이다. 작가가 설치한 장치로, 소설의 중간 중간에 흔들리는 킬러의 자아가 거울에 비춰지는 자화상과 대화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마치 한 편의 스파이 소설을 보는 듯한, 긴박감과 첫 실패로 코너에 몰려 은퇴의 기로에 선 킬러의 갈팡질팡하는 심리묘사는 너무나 멋지다. 게다가 표적과 자신을 위협하는 적들에게 납덩이를 선사한다는 그의 말투는 느와르 영화스타의 멋진 대사처럼 들려온다.

두 번째 작품인 <악어> 역시 <감상적 킬러의 고백>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바로 몰입하게 만드는 포스를 느꼈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브루니 피혁회사의 창업자인 돈 비토리오 브루니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그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에 접근해 나가는 방식을 취한다. 그의 죽음의 사인을 밝히길 원하는 브루니의 딸 오르넬라와 사건을 맡은 아르파이아 반장과 키엘리 형사 그리고 죽은 브루니의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 보험회사의 사정관 다니 콘트레라스가 차례로 등장한다.

자연사로만 생각했던 브루니의 죽음에, 보호종으로 밀렵이 금지된 남아메리카의 야카레(Yacare Caiman)라는 악어 사냥과 야카레와 떼어 놓을 수 없는 아나레 족 인디오들의 몰살이 관계되었다는 숨겨진 이야기들이 주인공 콘트레라스의 치밀한 추리에 의해 들어나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아나레 족 인디오 전사들이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이탈리아에까지 잠입해서 치르는 복수전은 정말 통쾌 그 자체였다.

<악어>에는 파렴치한 서구 자본주의의 물질만능의 폐해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제3세계 환경보호라는 서로 상극을 이루는 두 가지 메시지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들의 삶과 밀접한 야카레 악어를 보호하려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아나레 족 인디오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솟아올랐다. 반대로 그들을 억압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 서구인들에 대한 반감은 최고조에 다다른다. 동정과 반감을 교묘하게 짜깁기한 작가의 교차 편집 서술에 찬사를 보낼 따름이다.

왜 그동안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에 대해 몰랐을까 하는 자책감이 들 정도로 <감상적 킬러의 고백>을 읽은 경험은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세풀베다는 올해 내가 만난 작가들 중에 커트 보네거트와 더불어 최고다. 이 책을 덮는 순간, 서둘러서 그의 다른 작품들인 <연애소설 읽는 노인>,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 그리고 <지구 끝의 사람들>을 주문했다. 읽는데 조금도 부담이 없으면서도(일단 짧다! 다른 이들에게 선물하기에도 좋을 것 같다), 많은 생각들을 하게 만들어 주는 촌철살인의 메시지들이 담겨져 있는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들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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