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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 특급 열차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칠레와 아르헨티나 남부의 극지방에 다다르는 지방을 일컫는 지명인 파타고니아. 21세기에 루이스 세풀베다의 글을 읽는 이방인에게 “파타고니아”는 기이하면서도 가슴에 공명을 울리는 이상향으로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로 파시스트 독재자 프랑코의 독재 치하의 에스파냐를 떠나, 남아메리카 칠레에 새로운 둥지를 튼 작가의 할아버지는 나이 어린 손자와 모종의 거래를 한다. 자신의 고향 에스파냐의 마르토스를 꼭 한 번 찾아 가라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자유를 고향을 떠나온 이들에게 피노체트의 쿠데타와 연이은 폭압적인 철권통치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 결과, 루이스 세풀베다 역시 조부의 운명 그대로 조국에서 쫓겨나 유럽과 조국을 제외한 남미 일대를 떠돌게 된다.
할아버지가 발행한 위대한 여행으로의 초대장으로 비롯된 이 자전적 기행문은 어느 피 끓는 청년 사회주의자의 젊음에서 2년 6개월을 앗아가 버린 칠레의 가장 악명 높은 테무코 교도소에서 출발한다. 교도소에서 더욱 단련되고, 성숙해진 젊은이는 그곳의 인간 백정들을 결코 잊지도 그리고 용서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긍지를 삶 속에 되새기게 되었다.
작가의 여권에 찍힌 “L"이라는 이니셜은 불순분자를 뜻하는 낙인처럼 그를 쫓아다닌다. 에콰도르 산 바나나의 수출항인 볼리바르(마찰라 부근의 푸에르토 볼리바르를 구글맵을 통해 직접 찾아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에서 강의를 하고, <라 콘키스타다> 농장에서 대를 이을 자식을 낳기 위한 종마 같은 데릴사위가 될 뻔 하기도 하고, 남극 바다를 떠도는 배를 타기 위해 칠레 남단의 섬 칠로에까지 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낱 글쟁이에 불과한 이의 모험이 이렇게도 다채롭고 경이로 가득하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를 읽으면서 작가의 기행의 중심에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방점이 찍혀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어느 지역에 한다하는 세력가의 시신을 가족 묘지로 이동시키기 위해, 비행기를 개조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 남극의 비행 장의사 카를로스 노 마스,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고 남미의 모처에 숨어 사는 슬로베니아 출신의 나치 전범 카를리토스 카르핀테로 그리고 작가에게 아슬아슬한 곡예비행을 통해 진정한 아마존의 진수를 보여준 팔라시오스 기장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과거를 묻지 않는 파타고니아에 사는 정말 다양한 삶의 형태를 가진 이들이 줄줄이 소개되고 있었다.
작가의 기나긴 여행의 대단원은 역시 할아버지의 고향 에스파냐의 마르토스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마치 자신의 고향을 찾아 목숨을 걸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의 회귀 본능처럼 루이스 세풀베다는 자신의 뿌리를 찾아 물설고 낯선 안달루시아의 마르토스에서 할아버지의 유일한 혈육인 작은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지금은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는 아르헨티나의 오지 엘 투르비오에서 시작되어, 대서양 연안의 리오 가예고스에 이르는 240km 거리를 오가는 열차였다고 한다. 목동들의 열차인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에는 그들의 삶의 애환과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노스탤지어처럼 다가온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집착이라고나 할까, 왜 그 털털거리며 오지를 누비는 기차가 타보고 싶은걸까.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 조국에 갈 수 없게 된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의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에는 절절한 조국애에 대한 작가의 비애가 스며들어 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수백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조국을 찾게 된 어느 망명자의 고뇌와 훗날 자신의 작품세계의 바탕이 된 대륙의 이야기들이 숨 가쁘게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칠레라는 나라는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장렬하게 산화한 위대한 사회주의자 출신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 박사의 동음이의어처럼 다가온다. 과연 내가 그 세계의 끝에 가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칠레에 가게 되면 아옌데 박사의 묘와 더불어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 새로 생겼다. 그곳의 이름은 파타고니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