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나는 모래 위를 걷는 개
게키단 히토리 지음, 서혜영 옮김 / 이레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게키단 히토리라, 전혀 처음 듣는 이름이다. 일본의 영화배우 겸 탤런트라고 하는데 2006년에 그가 쓴 <소리나는 모래 위를 걷는 개>라는 책이 2년 만에 백만 권이 팔리면서 일본에서 5년 만에 밀리언셀러가 탄생했다고 한다. 아니 그렇게 대단한 책이란 말인가? 사실 밀리언셀러라는 타이틀에 현혹이 되긴 했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인생> 그리고 드라마 <전차남>에도 출연했었다고 한다. 그전에 <전차남>을 아주 재밌게 본 적이 있어서 그의 모습을 떠올려 봤지만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연기보다는 글 쓰는 재주가 더 뛰어난 걸까? 맨 끝의 역자 후기를 보니,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미국 알래스카와 일본을 오가면서 외톨이로 자라게 됐고 그 때의 경험이 축적되어 그만의 문학세계를 이루게 되었다고 했던가.

작년 여름에 아주 인상 깊게 읽었던 가네시로 카즈키의 <영화처럼>의 구성처럼 게키단 히토리의 <소리나는 모래 위를 걷는 개> 역시 연작 옴니버스 형식을 취하고 있다. 모두 5개의 작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평소보다 더 예리한 주의력이 요구되는걸 느낄 수가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부분들이 책 속의 다른 이야기 속에 불쑥불쑥 튀어 나오니 말이다. 그리고 또 어떤 이야기들은 그전에 나왔던가 하는 착각적 기시감을 창조해 내기도 했다.

평범한 샐러리맨의 생활을 하던 보통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홈리스들의 생활에 매력을 느끼게 되고 낮에는 샐러리맨으로 그리고 밤에는 홈리스로 살아가게 된다. 아예 나중에는 정상적인 삶 대신에 홈리스로 변신해 버리고 만다. 하지만 철저하게 홈리스로 살아가면서도 성욕과 자존심은 통제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동료 홈리스 모세가 유명한 야구선수로 성공한 아들을 만나는 것을 보고, 또 쓰레기 처리장에서 폐기된 도시락을 두고 어느 젊은 홈리스와 드잡이 질을 하다가 자신의 가정과 일상으로 복귀할 결심을 하게 된다.

다음 이야기는 한물간 아이돌 스타를 흠모하는 어느 오타쿠 청년의 이야기다. 이젠 이십대 중반으로 아이돌 스타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다케다 미야코를 극중의 화자 나는 너무너무 사랑한다. 물론 그건 일방적인 원웨이 사랑이다. 그녀에게 정성이 담긴 손 편지를 쓰고, 행사장에 가는걸 마다하지 않지만 달랑 네 명의 팬만이 모인 사진발매 기념 행사장은 초라하기만 하다. 그녀는 데뷔곡 “돌아보며 키스”를 부르며 관객들을 돌아보다가 깜짝 놀란다. 우여곡절 끝에 텔레비전 프라임 시간대에 출연을 하게 되지만, VTR 화면 속의 정말 하찮은 존재로 등장하게 된다. 일상의 고고한 꽃이기 보다는, 꽃밭 가운데 튀어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도통 운이 따르지 않는 아이돌 스타의 고달픈 삶을 ‘나’는 관조한다.

세 번째 에피소드 <핀트가 안 맞는 나>, 스무 살 여성 프리터로 생활하는 나는 아무런 꿈도 없다. 누가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뭣해서 그냥 카메라맨이라고 둘러댄다. 게다가 핑계 김에 디카도 사고, 메모리도 구입을 하게 된다. ‘나’는 타인과의 소통에 있어서 너무 서투르다. 그러니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자신이 사모하는 남자에게 철저하게 이용만 당한 나는 전철역에서 그만 ‘추락’하고 만다. 하지만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랑.

네 번째 인물인 역무원 ‘나’는 25살 때부터 시작한 도박과 다중채무자라는 굴레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다. 파친코와 슬롯머신 그리고 경마에 모든 돈을 쏟아 붓는다. 나에게 확률의 여신은 외면을 하고, 결국 벼랑 끝에 몰린 나머지 삶의 터전인 역에서 세상을 하직하려다 ‘핀트가 안 맞는 나’와의 조우로 모진 삶을 이어나간다. 이번에 내가 생각한 방법은 전화사기, 하지만 무엇 하나 되는 일이 없다. 어느 할머니와의 전화는 거의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만, 엔딩에 가서는 진부하면서도 먹먹한 멍울을 가슴에 남긴다.

마지막엔 타이틀인 <소리나는 모래 위를 걷는 개>다. 왠지 철학적일 것 같은 제목이지만 사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소리나는 모래 위해서 사랑을 해서 주인공 나루코가 태어나게 되었노라는 깜찍한 이야기다. 나루코는 어려서 친부와 새아버지를 잃고, 아사쿠사에서의 옛 인연을 찾아 도쿄로 떠난다. 그녀는 어쭙잖은 개그를 선보이는 푸들 라이타를 찾아 헤맨다. 그리고 그를 찾는데 성공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여인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역시나 엇갈리는 사랑의 이야기. 그리고 이별.

지난 가을에 처음으로 일본 도쿄에 다녀왔는데 그 때 갔었던 장소들 덕분인지 <소리나는 모래 위를 걷는 개>에 등장하는 장소들이 하나 같이 낯설지가 않고 친근하게만 느껴졌다. 아이돌 팬들이 사인 한 장 받겠다고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아키하바라, 도쿄의 골목길 어디에서고 볼 수 있었던 파친코와 슬롯머신들 그리고 숙소가 있었던 아사쿠사의 센소지가 특히 그랬다.

게키단 히토리는 거창한 이야기들이 아닌 우리네 일상의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소박한 면들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마치 독자들의 감정을 저글링하듯이, 웃음과 울음 사이로 인도한다. 거기에 유기적인 순환적 옴니버스 구성은 극적 긴장감을 바짝 조여 온다. 너무 몰입해서 책을 읽다가 그만 퇴근길 전철 안에서 그만 내려야할 정거장을 지나칠 뻔 했다. 그 정도로 대단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는 멋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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