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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나이트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평점 :
커트 보네거트(1922~2007)의 책과 첫 만남을 가졌다. 책을 읽기 전에 책날개와 온라인 서점의 저자 정보에 실린 그의 간단한 약력을 살펴보니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로 벌지 전투에서 생포되어 독일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 때의 경험들이 나중에 그의 저술로 발표되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에서 보네거트 특유의 풍자와 블랙유머가 스며 있다고 하는데 이 <마더 나이트>에서도 자신의 장끼들을 유감없이 펼쳐 보이고 있었다.
“하워드 W. 캠벨 2세의 고백록”이라는 제목으로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간첩으로 암약한 하워드 W. 캠벨 2세라는 가공의 인물의 파란만장한 회고가 전개된다. 그가 자신의 회고록을 작성하는 시기는 공교롭게도 실재했던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예루살렘에 갇혀 있던 시기와도 겹친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엔지니어인 아버지를 따라 독일에 갔다가 그곳에서 성장하면서 나치당 이념에 충실한 극작가 된 하워드 W. 캠벨 주니어는 전쟁 전 프랭크 위르타넨이라는 미국 정보 장교에게 포섭되어 미국을 위해 활동을 한다. 하지만 너무나 유능했던 하워드 W. 캠벨은 나치의 고위 관료들인 히믈러와 괴벨스까지 감동해 마지않을 정도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나치의 선전전을 수행한다. 유일하게 그를 간첩이라고 의심한 사람은 그의 독일인 장인인 베르너 노트 정도였다.
전쟁 중에 사랑하는 아내 헬가 노트를 잃은 하워드 W. 캠벨은 전쟁이 끝나고, 포로로 잡히지만 프랭크 위르타넨의 도움으로 미국 뉴욕의 그리니치빌리지로 이주해서 신분을 감추고 조용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기구한 그의 삶은 하워드 W. 캠벨이 순탄한 삶을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소련 간첩이자 화가를 자처하는 조지 크래프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게 되면서, 캠벨의 삶은 냉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보네거트의 <마더 나이트>에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어서 어디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물론 나치의 전쟁범죄인 유태인 홀로코스트에 의한 분노에서부터, 전쟁 중에 소모품처럼 사용되고 전후에 잉여 전쟁 물자처럼 내팽개쳐진 캠벨의 억울함 그리고 그의 전쟁 중에 행동에 감명을 받고 그를 숭배해 마지않는 미국 내 극우파 파시스트들의 어설픈 망상에 이르기까지 보네거트의 냉철하면서도, 진실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연초에 읽은 칠레 출신의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처럼 보네거트의 <마더 나이트> 역시 순전한 소설적 허구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순간에도 여전히 어디에선가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자신과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배척하고 자신들만이 절대적인 선이라는 망상에 빠져 신들의 이름을 들먹거리면서 치졸한 인종차별과 폭력을 옹호하고 있는 국수적 파시즘과 전체주의에 대한 보네거트식의 신랄한 비판이 <마더 나이트>에 담겨져 있다.
물론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는 풍자와 블랙유머는 어쩌면 딱딱할 수도 있는 책의 주제들에 부드러운 윤활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후 뉴욕에서 잉여 전쟁물자들을 구입해서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하워드 W. 캠벨 자신이 잉여물자일지도 모르겠다는 냉소적인 생각에 도달하게 해준다. 그가 나치를 위해 발표한 작품들을 베를린 공략 당시 처음으로 베를린에 진입한 소련 병사가 입수해서, 자신의 (공산주의식) 창작으로 발표를 해서 대성공을 거두는 에피소드 역시 멋진 설정이었다.
물론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의 과거를 잊으려는 마음과 한편으로 나치 전범들을 지구 끝까지 쫓아가 인류의 이름으로 법정에 세우겠다는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의 대조적인 모습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책의 초반에 등장한 아우슈비츠의 “연탄”이라는 표현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마치 한 편의 스릴러 소설을 읽어가는 듯한 구성으로, 과거 현재 그리고 다양한 정치적 상황들을 배경으로 이렇게 멋진 이야기를 가공해낸 커트 보네거트의 내공이 돋보이는 수작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참 동안을 생각하게 만들어준 그런 멋진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