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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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아지즈 네신과 나의 첫 만남은 지난여름이었다. 같이 일하는 사무실 동료에게 책선물을 해주겠다고 했을 때, 그가 원한 책이 바로 아지즈 네신의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이란 책이었다. 물론 난 아직 읽어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에 아지즈 네신의 다른 작품인 <행방불명 야샤르>를 구입했다. 하지만 정작 첫 대면은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로 낙찰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어언 60년 전, 트루먼 독트린으로 미국의 우산 안으로 들어가려던 작가의 조국 터키의 상황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아지즈 네신은 10개월간의 실형과 4개월 10일간의 유배형을 선고받는다. 물론 요 부분은 책의 본문에서는 소개가 되지 않고 맨 끝의 작가 후기를 통해 소개가 된다. 궁금했던 점을 풀어줘서 아주 고마웠다.

이 책은 바로 아지즈 네신이 유배지 부르사에서 겨울을 나던 시기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예전 오스만 터키 시절만 하더라도, 유배형을 사는 이들에게 허드렛일이라도 하게 해줘서 적어도 먹을거리와 잠자리 걱정은 하지 않았다는데 현대 터키에서 유배형을 선고 받은 이들은 그야말로 불가촉천민 같은 존재였다. 아지즈 네신의 친구들도, 동창들도 모두 그를 외면한다. 정치범인 그와 접촉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에게 돌아올 불이익 때문인 것이다. 아지즈 네신은 이미 자신을 유배형에 처한 이들을 용서했지만, 자신을 외면했던 이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날리고 있었다.

작가로서 섬세한 감정의 소유자인 화자이자 주인공인 아지즈 네신은 무엇보다 굶주림에 시달린다. 당장의 끼니를 해결할 수가 없어, 고민하는 그의 모습은 무장해제된 지식인의 무능력함으로 치환되고 있었다. 문학을 하는 것도 좋지만, 실질적인 기술을 익히는 것도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작가의 지론이 가슴에 와 닿았다. 한 잔의 짜이와 빵조각을 위해 자신과 생사고락을 같이 한 담요를 팔아 끼니를 잇기 위해 부르사의 뒷골목을 전전하는 그의 뒷모습이 너무나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지식인으로써 지인이 보내준 책들을 팔아 역시 양식을 마련해 보려는 그의 망설임 역시 충분히 이해가 갔다.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작가의 우국충정만큼이나 실질적인 생존을 위한 자신과의 싸움을 나름대로의 해학으로 버무려내는 아지즈 네신의 내공이 놀라웠다. 어떻게 보면 타인에게 들어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비참했던 과거를 유머로 승화시켜 결국엔 작품으로까지 발표한 그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가족에 대한 사랑 역시 남 못지않다. 결국 적발되면 추가형량을 선고 받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서, 유배지 부르사를 남몰래 이탈해서 가족이 있는 이스탄불을 몰래 찾는다. 한편 부르사에서 알게 된 문학청년의 몹쓸 습관인 관음증에 대한 작가의 기술이 흥미롭다. 예의 관음증으로 대변되는 훔쳐보기는 그 개인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당시 계엄 하의 서슬 퍼런 군부독재 하에서 많은 이들이 즐기던 국민스포츠였다. 지휘고하 노소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훔쳐보기에 몰입해 있었다. 작가가 슬쩍 언급했듯이 이 훔쳐보기가 다른 사람들의 일이 끼어들기 좋아하고, 충고하기 좋아하는 터키 사람들의 국민성에 대한 은근한 풍자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는 확실히 유쾌하고 재밌는 책이다. 하지만 한 꺼풀만 벗겨 놓고 보면, 희망마저 거세된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작가의 비참했던 과거를 직시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계기로 해서, 작가의 다른 책들과의 만남을 이어가고 싶어졌다.

사족으로 터키어를 전공한 이난아 씨의 번역으로 아지즈 네신의 작품과 만나게 된 행운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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