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계 - 중국의 4대 미녀
왕공상.진중안 지음, 심우 옮김 / ODbooks(오디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원제는 사대고전미녀(四代古典美女)로, 중국 고전에 등장하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네 명의 미녀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아마 거의 모든 이들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당나라 현종과의 로맨스로 유명한 양귀비, 동탁과 여포의 사이를 틀어 놓은 연환계의 주인공 초선, 한나라와 북방의 흉노 간의 대전란을 막아낸 왕소군 그리고 춘추오패 중의 일국으로까지 번영하던 오나라를 망국으로 이끌어간 서시.

그런데 이번에 출판된 미인계(美人計)는 중국 고대의 전략서 육도(六韜)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손무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손자병법> 36계 중에 31번째로 상대방의 마음으로 딴 곳으로 돌리는 병법론이다. 물론 이 방법의 시행을 위해서, 절세 미녀가 필요하다. 철저하게 여성성을 남성의 시각에서 인식한 목적론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사실 이 책 <미인계>에서도 양귀비만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인물들 모두 그런 수단으로 이용되면서 비운의 운명이 예시되고 있다.

시대적으로 가장 늦은 양귀비 이야기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그만큼 중국의 미인들 중에서 양귀비가 차지하는 명성 때문일 것이다. 측천무후의 전횡으로 이씨들의 왕조였던 당나라를 바로 세우고, 치세 초기 “개원의 치”라고 불릴 정도로 명군으로 칭송받던 당의 현종은 자신의 아들은 수왕 비 양귀비 옥환을 자신의 비로 들이면서, 도덕성에 흠집을 내게 된다. 하지만 중국 역사에서 자신의 며느리를 취한 이가 어디 당현종 뿐이던가.

문제는 양귀비가 당황실의 여주인이 되면서 야기한 국정문란에 있었다. 남방의 촉주 출신인 양귀비가 좋아하는 진귀한 과일들과 각지의 특산물들을 진상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의 고초는 하늘을 찔렀고, 언제나 그렇지만 불필요한 궁궐 축조 등은 백성들의 원망에 사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양귀비 일족들인 양국충과 괵국 부인들의 전횡은 결국 현종 말기 안록산이 반란이라는 당나라를 뒤흔들 전대미문의 위기를 초래했다.

하지만 왕공상과 진중안, 이 두 명의 작가들은 어디까지나 가무에 능한 양귀비와 그런 양귀비를 사랑하는 현종에 로맨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국 반란군에게 쫓겨 피난 중에 병사들의 원망을 한 몸에 받은 양국충은 주살되고, 양귀비마저 부귀영화를 뒤로 하고 자결하게 된다. 역사적 사실과 팩션 구성의 차이가 슬슬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초선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전체적인 줄거리는 엇비슷하지만 그 결말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하루가 다르게 기울어져 가는 한나라 말기에 우연한 기회에 황실의 궁녀로 들어가게 된 초선은 이름 그대로 황실에서 사용되는 모자를 관리하게 된다. 한실을 좌지우지하던 십상시들과 군권을 쥐고 있던 대장군 하진과의 권력대결 끝에 결국 하진을 모살하는데 성공하지만, 명문의 자제 원소의 역습을 받아 십상시 세력이 궤멸되는 난리 통에 초선을 궁궐을 탈출하고, 사도 왕윤의 거처에 있던 잃어버린 어머니와 재회하게 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들처럼 초선 역시 그 미모에 달이 스스로 가릴 정도의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고, 한 가지 악기 정도는 누구 못지않게 다룰 줄 알며 춤사위 또한 남에게 뒤지지 않는 그야말로 재색을 겸비한 여성으로 묘사가 된다. 물론, 자신의 처세에도 능해서 궁궐이 불타고 병사들의 난전이 벌어지는 아수라장 속에서도 보신에 능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왕윤의 수양딸이 돼서, 국가의 전권을 농단하던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하는 모습은 바로 <삼국지연의>에서의 그것과 일치한다. 문제는 그렇게 동탁과 자신의 아버지 왕윤마저 동탁의 잔당들에게 죽음을 당한 후, 초선의 행적이었다. <미인계>에서는 어려서 같이 자라 이제는 조조의 휘하에 들어가 있는 소대의 밀명을 받아 여포의 몰락을 유도하는 반간을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 후에는 관우의 시비로 들어갔다가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맡게 된다고 한다. 이 부분은 정말 팩션을 뛰어 넘어, 새로운 소설 창작의 수준에까지 이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타자는 아마 이 책에 등장하는 미인들 중에서 가장 덜 알려진 왕소군이다. 왕소군 역시 한나라 궁정에 들어갔지만, 황제에게 궁녀들의 초상을 그려 올리는 화공 모연수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는 괘씸죄에 걸려 왕소군이 연주하는 비파 소리에 나는 기러기마저 떨어진다는[落雁] 그녀의 미모가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된다. 한나라 초기, 한 제국을 위협했던 흉노족의 선우 호한사는 한나라의 부마가 되고자 청혼을 하고, 궁정에서는 별 볼 일 없는 궁녀를 황제의 누이동생으로 삼아 흉노족을 달래고자 한다. 이 때, 간택된 궁녀가 바로 왕소군이었다. 하지만 직접 왕소군을 본 황제는 마음이 달라져, 다른 여인을 왕소군인체 호한사에게 시집보내고자 한다.

이런 한나라 황실의 변덕스러움에 분노한 흉노의 호한사는 전쟁까지 불사하고자 하는데, 결국 황제의 어머니인 태후는 왕소군을 설득해서 국가의 안위를 위해 북방의 오랑캐의 땅으로 시집보내게 된다. 왕소군 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철저하게 타인에 의해 비련의 주인공이 된다. 또 모르겠다, 한나라 궁정의 일개 궁녀가 아닌 흉노의 왕비가 되어서 나름 행복하게 지냈을지도 말이다. 호북성 삼협 자귀현 출신이라는 왕공상의 동향인에 대한 흠모가 절로 배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서시는 월나라 출신으로, 오나라에 잠입을 해서 오왕 부차를 현혹시켜 끝내 망국에 이르게 하는 현대로 치자면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전형을 보여준다. 역사서에서 참조를 했는지 아니면 작가의 전적인 상상인지 모르겠지만, 서시와 더불어 동향의 정단 그리고 동시까지 등장을 시켜 한층 복잡한 로맨스를 이끌어 낸다.

더 흥미를 끄는 건 서시를 이용해서 오나라의 국력을 소모시키자는 아이디어의 주인공인 대부 범려와 서시와의 로맨스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적국에 파견해서, 반간의 주인공으로 삼아야 되는 임무를 맡은 범려의 고뇌하는 모습이,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 조국을 위해 자신을 초개같이 버려야 하는 서시의 인간적인 면모가 교차되면서 이루어질 수 없는 러브 스토리가 펼쳐진다. 물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종착역은 비극으로 귀결된다.

읽기 전에 많은 기대를 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역사도 아닌 그렇다고 해서 로맨스 소설이라고 하기에도 어정쩡한 그런 모습에 실망했다. 차라리 소설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운명에 도전하는 듯한 모습을 그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들은 모두 하나 같이 남성들에 의해 이용당하는 평면적 여성상으로만 그려지고 있었다. 그녀들은 자신의 운명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받아들인, 체념의 화신들이었다.

번역에 있어서도 매끄럽지 못하고, 심지어는 역사적 사실마저 왜곡하는 면들이 눈에 띄었다. 200페이지에서 조조는 “유비, 원술, 원소, 관도 등과 대전역”을 치렀다고 나오는데, 관도(官渡)는 사람이름이 아니라 원소 등과 천하의 패권을 놓고 전투를 벌인 지명이다. 298페이지에서도 원제의 황후의 조카인 왕망이 동한을 일으켰다고 기술했는데, 왕망은 전한을 멸망시키고 단명한 새로운 왕조인 신(新)나라를 나를 세웠다. 동한을 일으킨 건 왕망이 아니라, 동한(혹은 후한)의 광무제 유수(光武帝 劉秀)였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서시 편에서 심각할 정도로 오류가 보인다. 351~2페이지에서 오왕 부차가 오자서의 도움으로 왕료(오왕 료의 오기로 보인다)를 암살하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사실은 전왕인 합려가 공자 시절에 왕이었던 료를 용사 전제에게 어장도로 암살한 고사를 착각한 기술이다.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이야깃거리들이 그 방향성을 잃으면서, 그 동력을 상실해 버렸다. 게다가 역사적 사실마저 곡해해서, 소설화시켜 버리면서 팩션으로서의 장르성 마저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아쉬운 글읽기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