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사진관
김정현 지음 / 은행나무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가슴이 먹먹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책을 읽기 전에 간략한 소개를 보고 나서, 여느 책처럼 아버지의 부정(父情)을 다룬 신파겠거려니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작가가 10년 전, 단군 이래 미증유의 경제위기였다는 IMF 때에도 <아버지>란 책으로 그렇게 재미를 본거 같던데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아니 게다가 책 제목은 또 왜 이렇게 촌스러워, <고향사진관>이라니.

책을 읽으면서, 책을 읽기 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모두 맞아 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오십대에 뇌졸중으로 의식을 잃고, 자리에 누운 아버지 병수발과 나머지 식솔들을 보듬기 위해 자신의 날갯죽지를 접고,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하는 주인공 서용준의 삶이 친구인 지은이의 글을 통해 전해진다. 하지만 용준은 병상에 누워, 가장 기본적인 거동조차 못하시는 아버지를 보살피면서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 나간다.

군대를 막 제대하고, 세상을 향해 펄펄 끓는 자신의 열정과 자신의 꿈을 펼칠 시기에 졸지에 가장이 되어 버린 용준은 묵묵하게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해야 하는 앞으로 펼쳐질 형극의 시간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어려서부터 속이 깊고, 다른 이들을 위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용준이 어찌 자신에게 생명을 준 아버지를 보살피는 일에 소홀하겠는가. 손위 누이들을 시집보내고, 자신도 인근에 사는 착한 처자인 희순과 살림을 차린다.

용준은 희순을 사랑해서 결혼하는 게 아니라, 결혼하고 나서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게 된다. 본말이 전도된 듯한 상황 때문에 용준은 괴로워한다. 하지만 희순은 용준의 진실한 ‘사랑’의 약속을 믿는다. 어머니에게 떠밀리듯 그렇게 떠난 신혼여행지에서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은 용준과 희순은 바로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용준 부부의 아버지에 대한 병수발은 계속된다.

그렇게 병상에서 15년을 보내시며 고희를 맞으신 용준의 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 그렇게 꿋꿋한 모습을 보이셨던 어머니는 남편에 대한 서러움, 꽃다운 청춘을 저버린 자식에 대한 죄스러움으로 목매게 통곡을 한다. 이 책의 신파적인 전개를 따라 가던 독자들은 이 순간, 예정된 카타르시스의 폭발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좋으련만, 작가의 실존했던 친구를 모델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설상가상으로 치닫는다.

이 책을 통해 김정현 작가는 독자들에게 아버지를, 어머니를 그리고 남편, 아내, 형제들 그리고 자식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물어 보는 것 같다. 아니 그 어느 누구고 사랑할 줄은 아느냐고 되묻는다. 우리들은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서 ‘내리사랑’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다. 사랑은 내려가는 것이라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런 아가페적인 사랑 말이다. 그런 사랑에 무슨 대가가 필요하리오.

주인공 용준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누운 채, 무의미해 보이는 하루의 삶을 타인의 도움에 의해 영위해 가는 아버지를 통해 진정한 사랑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어머니, 형제, 아내 그리고 자식들을 사랑하는 법을 차근차근 배워 나간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때가 되었을 때, 자신이 배운 사랑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남김없이 표현한다.

처음에 예상했던 대로 지극히 주관적이고, 신파조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순식간에 타오르는 잉걸불 같은 사랑들은 쉬이 사그라지기 마련이다. 용준의 고향인 영주에 그의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카메라 셔터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들의 은근한 사랑의 이야기에는 여느 특별한 사랑들을 아우르는 힘이 있다. 난 이 사랑의 이야기에 완전히 압도당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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