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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크
퍼시 캉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끌레마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요즘처럼 디지털 카메라가 대중화되기 전에 필름 카메라와 더불어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있었는데,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아예 폴라로이드 필름을 더 이상은 생산하지 않는단다. 그러니 사용하고 싶어도 더 이상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는 거다. 이렇게 일상에서 사용하다가 더 이상 그 제품이 생산이 되지 않는다면 어쩌지? 바로 이 시점에서 퍼시 캉프의 <머스크>는 시작된다.
올해 69세의 아르망 엠므 씨는 25년간 철도공사 직원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은 프랑스의 비밀정보부에서 암약해온 인물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그는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삶의 규율을 적용시키고, 옷매무새가 흐트러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가 없을 정도의 멋쟁이다. 하지만 그건 이미 40년 전의 이야기이고, 이제 그는 평범하게 늙어가는 노인네다.
여자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엠므 씨에게는 자신만의 비장의 무기처럼 느껴지는 존재가 있으니 그건 바로 <머스크> 향수다. 발정기의 사향노루 수컷에서 추출한 천연재료로 만든 향수는 ‘호색한’ 엠므 씨의 평생의 동반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엠므 씨는 자신의 정부 이브로부터 자신의 냄새가 바뀌었다는 지적을 듣는다. 거의 평생을 함께 해온 향수의 변화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늙어 버렸단 말인가? 크로노스의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우선 엠므 씨는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해낸다. 머스크의 제조회사에 정중하게 편지를 써서 답장을 받는 엠므 씨. 회사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천연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머스콘이라는 인공재료를 사용해서 <머스크>를 계속 생산할거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하지만, 엠므 씨에게 필요한 것은 ‘인공’ 머스크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전 프랑스 나아가서는 전 세계에 망라해서 <머스크> 향수를 획득하기 위한 가열찬 투쟁에 나선다.
하지만 그의 남은 생애 동안 필요한 절대량의 머스크 향수를 얻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작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한 끝에 그는 향수의 양을 줄이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와 동시에 그는 존재감을 상실하면서 급속한 노화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의 자신의 추락을 볼 수 없었던 정보요원의 출신의 영리한 엠므 씨는 극적이면서도 결정적인 다른 방법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사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들은 <머스크> 책의 표지에 다 나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주인공 아르망 엠므 씨가 붉은 색의 머스크 향수를 뿌리는 장면. 그 향기는 이미지화 되어서 왼편으로는 제목인 <MUSK>를 그리고 있고, 오른편으로는 머스크의 원료를 추출하는 사향노루의 그림이 보인다. 남성인 엠므 씨와 그의 여성에 대한 선호, 그리고 그를 남자답게 만들어주는 그의 심리적 안정제라고 할 수 있는 수컷 사향노루는 모두 본질적으로 동일선상에 놓여져 있다.
물질자본주의 세계에서 직업에서의 소외, 다시 말해서 은퇴는 어떤 의미에서 남성성의 상실과 동가로 비추어진다. 한 때, 여성들에게 작업을 걸어 많은 성공의 추억들을 가지고 있는 아르망 엠므 씨는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노화) 대신 마스크 향수로 만들어진 인공적 이미지 속에서 여전히 과거의 영광들을 추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머스크 향수 생산중단은 그에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엠므 씨에게 그것은 단지 물질적 공급의 중단이 아닌 남성으로서의 자신감의 상실로 이어진다. 자신감을 되찾기 위해 엠므 씨는 부단한 노력을 계속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노화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결국 그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으로 몰린다.
2000년에 나온 탓인지, 현재 프랑스를 비롯한 EU 국가들에서 사용되는 화폐 단위인 유로가 아닌 프랑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에도 등장하는 향수의 도시 그라스에까지 머스크 향수를 찾아 나서는 아르망 엠므 씨의 집요한 여정도 또한 유쾌한 경험이었다. 예전에 <엠므 씨의 마지막 향수>라는 제목으로 2001년에 출간되었다가 작년에 다시 빛을 보게 된 책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그늘에 가려져 있던 재밌고 유쾌한 책을 다시 세상에 등장시켜준 끌레망 출판사에게 갈채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