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미궁
티타니아 하디 지음, 이원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쌍둥이 빌딩이 공중에서 납치된 여객기 테러로 무너진 이래 범세계적인 음모론이 대세인 것 같다. 이상하게도 이런 음모론의 다른 한 축에는 언제나 종교가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건 아마 종교가 부여하는 전승과 신화들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호주 출신의 여류작가 티타니아 하디가 이번에 발표한 <장미의 미궁>에서도 주인공들과 대립각을 만드는 이들은 바로 맹신적 종교에 심취한 악당들이다.

이미 기존에 발표된 <성혈과 성배> 그리고 그 유명한 <다빈치 코드>에서도 모두 초기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배척받은 영지주의(그노티시즘)의 영향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아닌, 학습이나 은밀한 깨달음을 통해 진리에 다가서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의 코드가 <장미의 미궁>에서도 반복된다.

16세기말 마지막 마법사라는 이름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총신이었다는 존 디(John Dee) 박사와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이탈리아의 지오다노 브루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존 디 박사가 자신의 가문에 딸들에게 남긴 비밀상자를 찾아내고 여는 과정을 다룬다. 400년의 시공을 넘나들면서, 티타니아 하디는 주인공들인 윌, 루시, 알렉스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인 사이먼과 그레이스, 아버지 헨리와 죽은 어머니 다이애나를 차례로 등장시킨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프리랜서 사진작가인 윌과 런던에서 잘나가는 면역학 전문의인 윌의 알렉스. 그리고 알렉스의 환자로 심장이식을 받게 된 루시가 스태포드 가(家)에 대대로 전해져 오는 비밀을 푸는 주인공들이다.

한편,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아마겟돈 전쟁으로 자신들과는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과 어중간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이들과의 마지막 대결을 원하는 일단의 무리들을 대변하는 피철런 월터스가 이끄는 비밀조직이 존 디 박사가 천사들과 나눴다는 비밀스러운 대화를 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알렉스와 루시들을 협박하기에 이른다.

팩션이라는 장르답게 아예 있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다루는 것이 아닌, 존 디나 혹은 지오다노 브루노와 같은 실존 인물들을 거론하면서 적절하게 있을 법한 이야기들을 작가는 곳곳에 포진시킨다. 그리고 역시 미스터리 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수수께끼들을 적절히 섞어낸다. 장소적 장치들을 보자면,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에서 로즐린 예배당과 같은 역할을 <장미의 미궁>에서는 프랑스의 샤르트르 성당의 미로가 대신하고 있다.

소수의 인원들에게 알려졌다는 영지주의 아이디어들도 이제는 더 이상 새로워 보이지가 않는다. 책에서도 잠시 언급되는 <도마복음서>는 물론이고, 얼마 전 공개되어져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유다복음서>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이 알려진 탓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책에서 많이 등장하는 셰익스피어 작품들에 대한 인용에서도, 무지의 소산 탓인지 주석이 없었더라면 정말 따라 가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았다.

유대교 비전의 근거한 카발라 사상에서 연유된 세상의 모든 것이 숫자에 의해 규명될 수 있다는 주인공들의 추리에서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나온 영화 파이(감독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떠올랐다. 예를 들어 남자의 수가 33, 여자의 수가 11이라고 하면 아이의 수는 44라는 식의 아이디어들이 <장미의 미궁>에서도 주인공들이 존 디 박사가 남긴 비밀상자 추적에 큰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신경세포의 기억의 전이라는 의학적으로 아직 규명되진 않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시도나 치밀한 인과관계에 의해 진행되는 뛰어난 구성에 호감이 갔다. 결국 결말에 가서는 ‘권선징악’이라는 조금은 평면적인 진행이 아쉽기는 했지만 ‘한여름밤의 미스터리’로서는 손색이 없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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