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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 모던걸과 모던보이를 매혹시킨 치명적인 스캔들
이철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8년 6월
평점 :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불명의 이야기 <로미오와 줄리엣>의 결말은 정사(情死)로 끝난다. 어쩌면 해피엔딩보다 비극이 더 기억에 남는지도 모르겠다. 지은이 이철이 쓴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의 대부분은 바로 그런 비극으로 끝난다. 그래서 더 깊은 여운을 남기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들의 시대 및 공간적 배경은 일제의 식민 치하의 한국, 더 협의적인 개념으로 다룬다면 경성, 다시 말해 지금의 서울이다. 개화시기 서구의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자유연애라는 개념이 없던 조선에 새로운 연애풍속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연애라는 말조차 선교사들이 영어인 “LOVE"를 한자화시킨 거라고 했던가.
연애란 모름지기 짝이 맞아야 하는 법. 조선시대 성리학적 개념에서 여자보다 항상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던 남자들의 권위에 대항해서 새로운 교육과 사상으로 무장한 신여성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남녀 간의 평등권에 입각한 다양한 연애사가 등장하게 된다. 그 중에서 작가는 당시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11가지의 이야기들을 4부로 나눠서 소개한다.
“남녀상열지사”라 해서 개인의 연애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여전히 사회적으로 배척되고 있던 시기에 신여성들의 등장은 그야말로 사회에 큰 충격이었다. 자유연애는 물론이고,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이혼은 남성지배사회에서 죄악시되고 있었다. 게다가 빈부의 격차, 신분지위의 고하, 조국의 해방을 위한 사회주의 운동에 이르는 다양한 스펙트럼들이 겹치면서 이들의 연애사는 개인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라, 당시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던 제 문제들의 분출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은 초기 유행처럼 번지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연인들의 정사(情死)로 시작을 해서, 낭만적인 연애사건, 색다른 연애사건에 이어 혁명적 연애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당시의 여성들은 조혼이라는 시대적 풍습 때문에, 자신의 의지가 아닌 가문의 결정에 의해 일찌감치 출가를 하게 되고, 평생을 지아비의 경제력에 의존해서 살게 되면서, 자아의 정체성 확립이나 경제적 독립 같은 명제들은 그들에게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9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허정숙은 언론매체를 통해 남자들로부터의 경제적 독립을 외쳤지만, 정작 자신은 경제적으로 윤택했던 아버지의 도움을 받고 있었던 것처럼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괴리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었나 보다. 신식교육을 받고, 여성해방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당시 여성들의 삶은 경제사회적 조건 때문에 전통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소설가로 꼽히는 김명순의 경우에는 악의에 찬 김동인의 모델 소설이었던 <김연실전>과 지은이 이철이 사이비 사회주의자(177페이지)라는 극언까지 동원을 했던 김기진의 근거 없는 신랄한 비판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소위 지식인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이들까지도 여성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 사회적 인식 가운데 여성들의 자유연애에는 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좋았던 점 중의 하나는 우리가 고등학교 시절 국어시간에 죽어라고 외우던 <폐허>, <백조> 그리고 <문장> 같은 유수한 잡지에 직접 참가한 이들의 이름들이 다수 등장한다는 점이었고, 그 책들에 어떠어떠한 글들이 실렸었는지(이 책에 의하면 주로 가십들?) 알게 되면서 아! 그랬었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뭍 이야기 중에서 타인의 연애 이야기가 가장 재밌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그렇게 드라마 팬들이 많은 게 아닐까? 근 100여 년 전 소위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시기를 휩쓸었던 연애사건들을 되짚어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