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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평점 :

우리는 그동안 미국이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해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책의 출발점인 2021년 1월 6일 미국 의회에 일단의 폭도들이 난입한 사건은 전 세계에 묵직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게 백주에 미국 민의의 전당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긴 그보다 더 충격적인 최근의 계엄사태를 목격한 입장에서 우리가 그동안 믿어온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약한 시스템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지 않았던가.
공화당이 미국 남부 제주의 대안이 되기 전, 민주당이 백인우월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정당이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재건 시대를 거치면서, 민주당이 흑인들의 표가 필요해서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인 적도 있지만 결국 백인들의 표를 의식해서 흑인들을 투표에서 배제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는 역설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 유명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the Evil)>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독재의 평범성(Banality of Authoritarianism)>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마다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붕괴를 유도하는 일군의 정치인들은 무슨 대단한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전선에 나선 게 아니라, 오히려 극단의 정치를 발판으로 삼아 정치적 이익을 꾀하는 기회주의자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적극적인 무관심 때문에 민주주의의 쇠락이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남부에서 공화당은 “저주의 말”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엘리트주의 공화당은 남부로 눈길을 돌렸다. FDR이 이끄는 민주당이 뉴딜정책으로 대공황의 위기를 탈출하면서 전국적 지지를 얻게 되었고, 공화당은 영원한 소수당으로 떨어질 위기였다. 하지만 시민권 투쟁이 가속화되어 가던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거치면서 위기감에 휩싸인 남부 백인들에게서 공화당은 ‘정치적 금광’을 발견했다. 인종적 보수주의를 채택한 공화당은 백인 정당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기독교 집단까지 가세하면서 미국 남부는 공화당의 표밭으로 변신했다. 이어지는 선거에서 남부, 이른바 서던 벨트는 공화당의 막강한 지원군이 되었다.
2025년을 사는 미국인들에게 미국 건국 당시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만들어진 헌법은 ‘신성한 경전’으로 취급된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을 수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미국 시민들에게 의심 받는다. 헌법도 인간이 만들어낸 창작물이 아닌가. 그렇다면 당연히 시대에 맞지 않는 오류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론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가령 예를 들어 이제는 너무나 당연시되는 인종 평등과 여성참정권도 미국의 건국 초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저자들이 언급하고 있다시피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거저 얻어진 것들은 하나도 없다. 인종 평등 문제는 남북전쟁을 초래했고, 여성참정권은 한 세기에 걸친 치열한 투쟁과 수정의 과정을 거쳐 얻어낸 결과물이다. 새로운 진전을 위한 아이디어의 제안과 의제 설정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저자들은 자신들의 책에서 정확하게 짚어낸다. 그러니 미국 시민들이 보다 자유롭고 편한 방식으로 투표를 할 수 있도록, 기존의 유권자 등록 방식과 최다득표자 승자 원칙 같은 문제들을 수정할 수 있도록 헌법 개정을 시도해야 한다는 아이디어에 도달한다. 우리의 주민등록증 같은 전국적 차원의 내셔널 ID 발급에 대한 아이디어는 또 어떤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한 번도 그런 국가 차원의 신분증이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에서 가능할까라는 우려가 먼저 들었다. 50개 주마다 2명씩 배정된 상원 의원 선출 역시 지난한 투쟁의 결과로 얻어낸 민주주의의 산물이었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 수가 있었다.
미국의 최고 정치지도자인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인단 문제도 당연히 손을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21세기 들어(작년 이전까지) 공화당이 상원에서 미국 인구의 다수를 대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처럼 미국 대법원의 당파적 편향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 타협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법원에 끌고 가는 건 미국에서 선도적으로 실행된 모양이다. 유권자 다수의 상식과 대법원 구성 간에 간극이 벌어지면서 여론과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심지어 배심원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미국에서도!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의 저자들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이에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봉쇄(containment)와 배제(exclusion) 전략을 주문한다. 저자들은 이런 전략들이 매우 효과적이긴 방법이긴 하지만, 단기처방에 불과하다고 진단한다. 보다 적극적이고, 민주주의를 공고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이 제시된다. 하지만 여기서 아주 중대한 시간의 갭이 발생한다. 2024년 트럼프가 다시 한 번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 가지 문제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헌법 개정을 위한 조건을 낮출 것을 저자들이 주문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작년 대통령 선거와 의회 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을 거두리라는 점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노골적으로 미국 대통령의 3선을 금지하고 있는 수정헌법 22조마저 고쳐서 트럼프의 3선을 추진하겠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고 있다. 작금의 트럼프가 전 세계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관세 전쟁이나 대통령의 생일을 연방공휴일로 지정하겠다는 희극 같은 사태들을 그들은 아마 예상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조 바이든의 신승과 미국 시민들의 양식에 힘입어 미국식 민주주의의 복원력을 맹신한 게 아닌가라는 비판을 면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과연 미국 민주주의가 지닌 자율 교정 시스템이 대안일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든다.
미국을 필두로 해서 전 세계의 민주주의는 현재 지금까지 만나 보지 못한 위기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극단으로 치우친 정치적 소수는 평범한 독재의 가면을 쓰고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 체면이나 상식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든다. 이들의 행태에 다수의 상처받은 마음들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형형색색의 응원봉과 깃발을 들고 거리에 나서고, SNS 담벼락에 자신들의 주장과 생각들을 새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