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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말하는 하얀 고래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12월
평점 :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5/0104/pimg_7234051034556026.jpg)
내가 최애하는 작가 중의 한 명이 루이스 세풀베다 작가가 우리의 곁을 떠난 지가 벌써 5년이 되었다. 다시 코비드19의 위력을 실감한다. 우리가 그런 시절을 지나왔구나 하는 생각 한 조각.
그리고 을사년 들어 처음 산 책이 바로 세풀베다가 들려 주는 달빛 고래의 이야기 <바다를 말하는 하얀 고래>다. 부피는 얼마 되지 않지만, 상당한 울림을 담고 있다. 그리고 작년 말에 세풀베다의 신간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읽은 <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의 연장선이라고나 할까. 대지의 사람들, 마푸체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면 이번 책에서는 라프켄체(바다의 사람들)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니까 말이다. 이래서 한 작가의 책을 줄창 하나 보다.
그리고 보니 그의 어느 책에서 고래 사냥에 대한 이야기를 쓰지 않았었나. <바다를 말하는 하얀 고래>의 화자는 아주 덩치 큰 달빛 향유고래다. 이름부터 무언가 멋지지 않나. 그냥 달빛 고래라고 불러야지. 왠지 <바다를 말하는 하얀 고래>는 라프켄체 원주민들의 전설의 재해석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짧은 소설은 전적으로 달빛 고래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대지도 마찬가지겠지만, 바다에서 나고 자란 모든 것들을 바다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렇게 고래들도 모차 섬인가로 모인다고 했던가. 아니 라프켄체 사람들이 이생에서의 삶을 마치고 가는 곳이 모차 섬이라고 했던가. 그리고 고래 할아버지는 달빛 고래에게 비밀을 하나 들려준다. 고래 할머니들이 이생에서의 삶을 다한 이들을 등에 모차 섬에 간다고. 그리고 달빛 고래에게 미션을 하나 준다. 네 고래 할머니들의 호위 무사가 되라고.
달빛 고래는 인간들이야말로 유일하게 서로 종족을 죽인다는 걸, 해상전투를 통해 배우게 된다. 그들이 서로 보이는 분노와 증오의 원천이 무엇일까. 소통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로운 공존 대신 서로를 부수는 방식이 과연 올바른 걸까? 달빛 고래는 이해하지 못한다.
달빛 고래와 고래 할머니들 그리고 라프켄체들의 평화를 깨는 존재가 등장한다. 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빌런의 역할이다. 물론 아무런 갈등의 전개 없이 그냥 심심한 서사도 많다. 하지만, 세풀베다는 다른 방식을 골랐다. 고래잡이 선원들이 이 소설의 악역을 맡았다. 사자를 모차 섬으로 인도하는 고래 할머니들을 무자비하게 작살로 공격하는 고래잡이 선원들. 이미 혹등고래 어미와 새끼가 그들에게 무참하게 도살당하는 것을 보고 달빛 고래는 분노하지 않았던가.
그들을 유인해서 고래 할머니들과 떨어뜨리는 것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결국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고, 달빛 고래는 ‘모차 딕’이라는 새로운 별명으로 고래잡이 선원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맞은 작살은 훈장처럼 그를 따라 다닌다. 달빛 고래를 잡겠다는 인간의 탐욕은 멈추지 않는다. 결국 달빛 고래는 바다에 지게 된다. 오랜 시간에 지나 달빛 고래가 죽는 순간, 그의 몸에는 백여개의 작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달빛 고래의 꽂힌 작살은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의 상징이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5/0104/pimg_7234051034556027.jpg)
소설에 삽입된 일러스트들은 정말 훌륭하다. 고래의 눈은 마치 심연에서 독자를 지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새벽녘에 이 책을 읽어서 그런가. 고래의 몸에 빛이 있다는 것을 안 인간들이 고래잡이 혈안이 되었다고 한다. 어둠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은 고래의 몸에서 지방을 채취해서 어둠을 쫓는 빛의 광원으로 이용했다고. 용연향도 그들에게 귀중한 자원이었다. 우리 인간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고래들의 평화로운 일상을 파괴하고, 그들을 잡아다 가마솥에 쪄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야 속이 시원한 걸까.
남쪽 세계에는 참 많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는데, 세풀베다 선생이 들려주는 그 이야기들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어 너무나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