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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4
보리스 비앙 지음, 이재형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평점 :
오래 전부터 만나보고 싶은 그런 책이었다. 1946년 프랑스 출신 작가 보리스 비앙이 미국 스타일의 하드보일드 스릴러 작품을 번역한 것으로 위장해서, 버논 설리반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고 한다.
예전에 라스 폰 트리에가 미국에 한 번도 가보지 않고서 <도그빌>이라는 걸작을 만들어낸 것처럼, 보리스 비앙도 마찬가지였다. 작품은 너무 강렬하고 분량도 짧아서 단숨에 읽을 줄 알았지만, 며칠 시간이 걸렸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흑인 피를 1/8 정도 보유한 얼핏 보기에는 백인과 구분이 되지 않는 주인공 리 앤더슨의 증오 어린 복수극이다. 보통 스릴러하면 연상되는 내적 갈등 따위가 발붙일 틈은 없다. 리는 백인 소녀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동생을 위해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쳐있다.
불특정 피해자를 고르기 위해 리는 자신을 아는 이들이 하나도 없는 벅텀이라는 작은 마을 서점관리인으로 취업한다. 철저하게 자신의 의도를 감춘 채, 마을 소녀들과 일탈을 즐기는 리. 어떤 면에서 리는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선 그는 절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기타로 블루스 음악을 연주하고, 춤까지 잘추는 리는 소녀들의 관심을 독차지한다. 그런 가운데 부잣집 도련님인 덱스터를 알게 되고, 그를 매개로 리는 훨씬 더 부유한 진과 루 애스퀴스 자매에게 접근을 시도한다.
그의 타겟이 나이 어린 여성들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왜 리는 자신의 동생을 죽인 남자들을 목표로 삼지 않았을까? 그가 동생의 진혼을 위한 진정한 복수를 원했다면, 원인 제공자들을 공격하는 게 맞지 않았을까.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왜 그들을 대신해서 진과 루 자매가 희생되어야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어떻게 되는 좋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리의 최후에 전혀 동정이 가지 않았다.
소설 전개에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은 일절 배제하고, 오로지 복수라는 일념 아래 움직이는 리의 기계적인 모습과 순진하게도 리의 매력에 빠져 수렁에 빠져드는 진의 모습이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진의 그런 모습에 잠시 리의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지만, 그의 복수심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동생 루의 통통 튀는 매력에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언니 진과 달리, 리의 위험성을 알게 된 루는 그에게 총탄을 날리기도 한다. 그녀들이 마냥 사이코패스의 희생양은 아니었고, 저항의 일면을 보여주는 그런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소설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의 저간에는 미국 사회의 고질병인 뿌리 깊은 인종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리 앤더슨이 이런 무모한 행동에 나서게 되는 발단이 자기 동생의 억울한 죽음 때문이 아니던가. 동생의 가해자들이 정당한 처벌을 받았던가? 무려 1940년대다. 중범죄를 저지르고서도 백인 가해자들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리는 삐뚤어진 복수심에 불타, 애꿎은 루와 진을 희생시켰다.
리가 신앙심 깊은 자신의 형처럼 신에 귀의했다면, 해피엔딩이 되었을까. 아마 그러지 않았으리라. 억울하게 죽어간 동생에 대한 죄책감이 계속해서 리를 괴롭히지 않았을까. 엔딩에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 중인 리를 잡기 위해 추격에 나선 두 백인 경찰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기존 사회 질서를 허물고 나라를 혼란에 빠트린 “짐승”을 잡아 특진하기 위해 그들은 규정 따위는 모두 무시해 버리고 사방에 총질을 해댄다.
강력한 하드보일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리가 탄 뷰익의 정면 유리를 부순 장면이 책의 표지였다는 걸 리뷰를 쓰다가 알게 됐다. 아, 그랬군. 리의 최후는 장렬했고, 백인들은 이미 죽은 리의 시신 훼손도 마다하지 않는 장면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인종주의에서 비롯된 복수의 힘이 보여주는 가공할 분노가 소설의 전반을 아우른다. 무려 78년 전에 발표된 작품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강렬함을 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가 있었다. 나중에 다시 한 번 읽게 되면 또 어떤 감정으로 만나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