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통행증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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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미미 여사 책읽기에 불이 붙은 모양이다. 9년 전에 내리 5권을 읽고 나서, 쉬다가 이달 들어 3권을 잇달아 읽었다. 그동안 책들이 많이 나와서, 이번 추석에는 도서관에서 미미 여사의 책들을 왕창 빌려다 읽어야지 싶다.

 

에도 시대는 물론이고 현대 일본의 지명에 대해 좀 더 안다면, 미미 여사가 구사하는 에도 마치 이야기에 좀 더 몰입을 하지 않을까 싶은데 역시나 구글맵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조 후카가와나 간다니 하는 지명이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어쨌든 미시마야 시리즈 7번째 책인 <영혼 통행증>에는 세 개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이제는 모두가 알다시피 미시마야 흑백의 방에는 괴담을 들고, 그집 도련님인 청자 도미지로에게 들려 주고자 찾는 이들이 많다. 그것은 마치 도미지로가 듣는 괴담을 바로 옆에서 듣는 격이라고나 할까. 미미 여사는 지상중계하듯이 이야기의 결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아이고 재밌어라.

 

흑백의 방 규칙은 모두 알고 있다시피, 철저하게 화자의 실명이나 이야기가 벌어지는 장소에 대한 익명성을 보장한다. 화자는 말하고, 청자는 잊는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도미지로는 반지에 한 컷 정도 그림을 그리고 오동나무 상자에 봉해둔다. 스타일도 참 멋지지 않은가.

 

첫 번째 이야기인 <화염 큰북>의 화자는 오카지 번 출신의 헌헌장부 사무라이 나카루마 신노스케, 고신자다. 전근대 시대, 화재는 다이묘가 다스리는 번에 사는 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재앙 중의 하나였다. 일본 건물들의 대다수가 목재로 만들어졌으니, 불이 나면 삶의 거처인 집과 재산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다. 번주의 가장 중요한 사명 중의 하나는 바로 이 화재 진압에 있지 않았을까.

 

오카지 번의 자랑하는 보물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런 화염/화마를 제압할 수 있는 혹은 경고를 해주는 큰북님이었다. 어느날, 이 큰북님이 절도당하고 훼손당하는 오카지 번으로서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고산지의 큰형님인 미남자 류노스케가 큰 부상을 당한다. 그리고 번주 오카지 가지에몬은 자신이 신뢰하는 무사들을 데리고 오보라케 연못의 터주님을 알현하러 출동한다. 나카무라 가문의 나이 어린 신노스케와 그의 형수 요시를 대동하고서.

 

어렵게 도착한 오보라케 연못에서 털북숭이 터주님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신물은 터주님의 손톱 조각을 하나 받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예의 손톱으로 새로운 큰북님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이어지는 놀라운 비밀은 오보라케 연못의 터주님에 대한 것이다. 번에 사는 이들의 번영과 안정을 위한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다면, 나카무라 신노스케도 그런 임무가 주어진다면 과연 마다하지 않을 것인가? 누군가를 책임질 필요가 없는 총각 고산지로서는 당장에라도 두렵지 않지만, 나중에 일가를 이룬 다음에는 또 다른 상황이 되지 않을까?

 

주군의 가문과 영지민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라면 언제 어느 때고 자신을 바치라는 명이 떨어진다면 망설이지 않겠다는 신노스케의 비장한 결심이 지나가 버린 사무라이 시대에 대한 하나의 그리움 혹은 아쉬움처럼 그렇게 다가왔다.

 

두 번째 이야기 <한곁같은 마음>에서는 에도 마치에서 꼬치경단을 만들어 팔던 소녀 오미요 집안을 소재로 삼는다. 모두가 알다시피 도미지로 도련님은 다른 건 몰라도, 맛난 음식에는 사족을 쓰지 못한다. 한 마디로 미식가라고나 할까. 자기만 맛있는 걸 먹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인심을 후하게 쓴다. 자신의 용돈을 들여, 미시마야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맛난 음식을 먹게 되면 사다가 제공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머니 오타미는 자비를 들여 둘째 아들의 선행을 지원하기도 한다나.

 

오미요의 작고하신 아버지 이사지는 요릿집 '마쓰후지'의 촉망 받는 미래의 요리사 후보였다. 그리고 어머니 오나쓰는 고아이긴 했지만, 뛰어난 미모로 접대 하녀로 활약했다. 마냥 행복할 것만 같았던 이 커플은 이사지가 폐병으로 더 이상 주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면서 불행의 테크트리를 타게 된다. 그리고 마쓰후지의 사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고급 요릿집이라는 성격마저 변질되게 되었다. 그전에 요릿상에 정갈한 음식을 내놓았다면, 유곽화되면서 여인을 상에 올리게 되었단다.

 

출중한 미모를 지녔던 오나쓰는 이름마저 나쓰에로 바꾸고, 병든 지아비를 부양하기 위해 색을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리 누구의 씨인지도 모를 세 명의 사내아이들을 낳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들은 모두 이사지를 닮았다. 하지만 나쓰에의 인기가 떨어지게 되자, 새로운 요릿집 안주인 오토미는 이사지 일가를 내쫓을 궁리를 하게 된다. 오갈 곳 없게 된 오나쓰들은 예전에 마쓰후지에서 일하던 오산 할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여장부 같이 당찬 기세의 오산이 수레를 끌고 와서 오나쓰 가족을 구조했다.

 

그리고 노점상으로 그나마 먹고 살기 시작했는데, 예전에 오나쓰의 손님이었던 남자가 등장해서 행패를 부리고 쌍둥이 같다고 생각했던 삼형제들의 얼굴이 하나도 닮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오나쓰 가족들은 드디어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좀 사는 집의 자식이지만 고급 음식 대신, 노점상에 파는 꼬치경단 같은 음식도 아무런 거리낌 없는 도미지로의 인격을 드러내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요건 좀 다른 이야기들에 비해 싱거운 느낌의 인스톨이지만, 미미 여사가 구사하는 모든 이야기들이 알싸한 맛을 지닐 수는 없으니까라고 생각하고 접어두자.

 

마지막 이야기인 <영혼 통행증>이야말로 이번 시리즈에서 미미 여사가 준비한 회심의 일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갑을 연상시키는 고희 나이의 세련된 복장을 한 깃토미 씨가 등장해서 반세기 전, 자신의 부친이 운영하던 싸구려 여관에 투숙했던 영혼 마을의 뱃사공과 봉인이 풀려 이승으로 나온 미나모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준다. , 그전에 처서 맞이 수박 타령도 했던가. 그리고 깃토미 씨는 준비해온 유카타를 흑백의 방 청자 도미지로에게 입어달라는 정중한 부탁도 했지 아마.

 

주인공 깃토미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할머니 오카메의 손에 양육됐다. 보통의 경우 조부모 손에 자란 아이들이 버릇이 없다고 알려졌는데, 깃토미의 경우는 달랐다. 오카메 할머니는 깃토미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인정사정 할 것 없이 곱자로 응징했으니까. 하지만 훗날 깃토미의 새어머니가 되는 입이 거친 오타케가 등장하면서부터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번에도 역시나 발도술처럼 곱자를 뽑아낸 오카메가 깃토미를 후드려 패려고 하는 순간, 오타케가 나서서 폭력을 무마시켰다. 여기서 발도술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웃기는지 잊어버릴 것 같지가 않다. 오카메에게는 곱자가 쌍절곤 같은 거였나.

 

어쨌든 오카메 할머니는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시고, 카메야 여관이 그럭저럭 운영되던 가운데 영혼 마을의 뱃사공이라는 시치노스케가 등장하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모든 망자들이 화혼이 되어 성불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고 한다. 저승에 가지 못하고 어떤 문제로 이승에 미련이 남은 노혼, 원혼들이 문제다. 시치노스케도 그런 원혼을 달래지 못해 낭패를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억울하게 죽은 망자의 혼들이 괴물이 되어 난동을 부리게 되면 정말 걷잡을 수 없는 그런 사태가 벌어지니까. 그렇게 되면 화혼이나 성불은커녕 영원한 저주의 고통에 시달릴 판이다.

 

깃토미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는 미나모 역시 그러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사람 좋은 깃토미 씨는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주어 억울하게 죽은 미나모, 아니 아오이 씨의 죽음을 신원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시치노스케에 따르면, 결국 미나모는 성불했다고 한다. 스스로는 위험에 내어 주는 희생정신으로, 아오이 씨는 원한을 풀 수가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좋겠지만, 느닷없이 등장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나이가 이제 막 임신한 오치카에 대해 그리고 세상의 업에 대해 말하자, 분노한 도미지로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이 오치카의 행복을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도대체 이 미스터리한 작자의 정체는 뭐지. 훗날의 무언가를 대비한 미미 여사의 거대한 떡밥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편에서 내가 뽑은 키워드는 희생과 헌신이다. 주군과 영지인 그리고 가족을 위해 개인의 안위는 언제라도 내던질 수 있다는 나카무라 신노스케, 폐병으로 병석에 누운 남편 이사지를 위해 색을 팔았던 오나쓰, 할머니 오카메의 손주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던 오타케 그리고 아오이 씨의 원한을 풀기 위해 스스로 요괴가 되는 걸 마다하지 않았던 깃토미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찾아볼 수 없게 된 어떤 가치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모습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다시 생각해 봐도 멋진 서사의 힘이 아니던가.

 

미시마야 흑백의 방 청자는 이헤에와 오치카를 거쳐 도미지로로 바뀌었다. 너무 오래 전에 오치카 시절의 이야기들을 읽어서 그런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조금은 부족한 듯한, 노련하지 못하고 세련되지 못한 도미지로 스타일의 청자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이번 연휴에 예전에 사기만 하고 읽지 못한 미시마야 시리즈를 찾기 위해 책방 정리를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그 책들이 어디에 가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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