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보는 소피의 세계 1 - 소크라테스에서 갈릴레오까지의 철학 만화로 보는 소피의 세계 1
뱅상 자뷔스 지음, 니코비 그림, 양영란 옮김, 요슈타인 가아더 원작 / 김영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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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도서관에서 내일 책을 반납하라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어라? 무슨 책을 내일까지 반납하라는 거지? 이젠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서도 읽지 않거나 아니 아예 무슨 책을 빌렸는지디 모르게 된 모양이다. <만화로 보는 소피의 세계1>이라고 한다. 아직 펴보지도 못했는데. 그래서 부랴부랴 책을 펴고 읽기 시작했다. 올해 파이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저자가 노르웨이 사람이니 아마 이 철학개관 소설, 지금은 그래픽 노블의 주인공인 십대 소녀 소피 아문센도 아마 노르웨이 사람이려니 싶다. 철학 개관서로 되게 유명한 소설이라고 하는데 나는 책으로는 만나 보지 못했다. 이럴 때, 그래픽 노블은 치트키로 되게 유용하다고 나는 주장한다.

 

수수께기 철학자의 편지가 도착하는 것으로 기후변화 시위를 준비하던 소피는 세계 철학의 세계에 뛰어 들게 된다. 철학과 판타지 그리고 그래픽노블의 만남이라,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이 책에 따르면 철학의 기본 덕목은 놀라움 그러니까 경이로움을 느끼는 거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삶에 있어서 아주 간단한 질문들,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진 걸까?

 

이런 거창한 질문을 던지면 일상의 노동에 찌든 우리들은 아마 대답할 말이 없지 않을까. 한달 전 회사 회식에서 친한 동료에게 무엇 때문에 사는지,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자신이 잘하는 일을 하며 산다고 말했다. 그런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가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는 나에게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난 단 1초도 주저하지 않고 언젠가 책을 쓰고 싶다고. 그리고 우드카빙의 명가 모라나이프를 당근에서 나무 조각을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 거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 중의 하나는 삶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그러지 못하는 건 아마도 그동안 우리 사회가, 우리 교육 시스템이 철저하게 암기위주의 교조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우리에게 주입한 덕분이 아닐까 싶다. 만약 교실에서 젊은 청춘들의 그런 엄청난(?) 질문들을 대하게 된다면 과연 교육자들은 어떤 대답을 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어쩌면 똑 떨러지는 대답을 원하는 질문들에 대답할 수 없는 그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회사는 해마다 그런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는데, 왜 우리들에게는 소위 넉넉한 떡고물이 떨어지지 않는가? 대표이사만 항상 최대 이익을 챙기지 않는가라고 말이다. 아마 이런 질문을 던졌다가는 바로 다음날 회사에서 자리가 비게 되지 않을까. 늘그막에 이런 심오한 질문들이 마구 발생하는 걸 보면 과연 그래픽노블 <소피의 세계>를 내가 제대로 읽지 않았나 하는 착각에 빠진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대단히 서설이 길었다. 철학의 출발점은 아무래도 그리스가 될 것이다. 여러 고대 철학자들이 책에 소개가 되지만 그중에서도 데모크리테스의 4원소론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몇 가지 원소로 구성되었다는 가설, 대단하지 않은가. 그리고 상당히 유물론적인 접근이 아닐까 싶다.

 

이성과 감각을 통해 자신이 사는 세상에 대한 정보를 취득한 인간은 필연적으로 질문을 동반한 사유를 하게 된다. 소피(이름부터 소피아 혹은 필로소피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역시 수수께끼 철학자와 동반한 철학 여행길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배우고 느끼면서 다음 레벨로 업그레이드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가. 여성을 불완전한 남성으로 묘사한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각성한 현대여성으로 바로 반박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바로 이거지! 결국 깨달은 사람은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그런 현실을 그대로 적시한다.

 

다음 수순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소크라테스의 등장이다. 델포이 신전에 써있던 말인 너 자신을 알라는 분수를 알거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알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세상만사를 모두 알 수 없다는 한계를 알라는 그리고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라는 격언이다. 그 말인즉, 결국 매사에 겸손하라는 말이 아닐까. 속된 말로 무식한 이가 용감한 법이다. 아니 한 권의 책을 읽고서 맹신적 모습을 경계하라는 말은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다. 지금도 여전히 철 지난 시카고 학파의 신자유주의와 그놈의 지긋지긋한 트리플다운 효과를 앵무새 타령하듯 주술처럼 외우는 나라와 보수 언론이 있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보다 겸손한 자세로 새로운 사유와 그런 사유에 기반한 창조적 도약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라는 판타지 회로를 돌려 보기도 한다.

 

다음 계보로 등장한 플라톤의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 철인정치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상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250쪽 가량의 분량에 자그마치 천년이 넘어가는 철학의 유구한 역사를 압축해서 다루는 저자의 패기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디오게네스로 대표되는 키니코스학파(혹은 견유학파)의 안분지족하는 삶에서는 미니멀리즘의 향기를 느꼈다. 사악한 쾌락주의자로 매도된 에피쿠로스의 추종자들에 대해서도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도 바울에 이어 초기 기독교의 위대한 교부였던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개종한 마니 교도였다는 점도 새롭게 알게 됐다. 이런 내가 미처 모르고 살았던 점들도 바로 놀라운 경이의 연속이 아닌가 말이다. 이렇게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된다면 자각한 개인은 나처럼 무언가 더 알고 싶다는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소피 아문센처럼 개인의 성장과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는 게 바로 저자가 철학 소설을 집필하면서 의도한 무언가가 아닌가 싶다.

 

얼마 전에 존 밴빌의 <케플러>를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품고 있던 생각들과 오래된 질문들을 격발시켰던 유사한 동인들을 <만화로 보는 소피의 세계>에서 다시 만날 수가 있었다. 이거야말로 명징한 그런 메시지가 아닐까. 이제 철학을 읽을 시간이 되었다는. 그런데 아쉽게도 <소피의 세계 2권은 나와 있지 않더라. 내일 도서관에 가니 원본 <소피의 세계>를 빌려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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