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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9
빌렘 엘스호트 지음, 금경숙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12월
평점 :
피터 박스올의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가운데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한 책이 바로 빌렘 엘스호트의 <치즈>다. 엘스호트가 1882년 생이니 19세기 사람이네.
소설 <치즈>의 주인공 프란스 라르만스는 종합 해양 조선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30년째 장기 근무 중인 회사원이다. 정말 징하게도 한 직장에서 오래도 해먹었구나. 그에게는 8명의 형제자매들이 있었고, 고령의 어머니는 노망이 나셔서 한 개 중대분의 감자를 깎거나 솜이불의 보풀 뭉치를 해체하시는 일로 하늘나라에 가실 준비를 하고 계시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들 앞에서 임종을 맞으신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우리가 언젠가 맞게 될 운명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형님의 소개로 알게 된 독신남 변호사 판스혼베커 씨의 소개로 명망가 클럽에 들어가게 되고, 변변하지 못한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의 주선으로 어느 날 갑자기 라르만스는 사업가로 변신을 하게 된다. 명망가 클럽에서 라르만스는 해외여행도 해보지 못하고, 그네들이 나누는 레스토랑 순례기에도 끼어들지 못하는 그런 천덕꾸러기 행세를 한다. 요즘 같으면 맛집과 호화 여행지 사진들이 넘실거리는 SNS에서 소외된 중년의 전형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들이 그에게 자극이 되었을까. 얼떨결에 네덜란드에 위치한 호른스트라사로부터 고지방 에담 치즈를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에서 판매하는 총책을 맞게 된 라르만스. 그것은 1933년 당시 마치 로또 맞은 그런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판단한 라르만스는 당장에 다니던 조선소를 때려 치울 생각을 하지만 식구(아내)와 열두 살이나 많은 큰형님의 만류로 직장과 사업을 병행하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나중에 판명되지만 잘한 결정이었다.
자신이 만날 회사에서 계약서를 다루었으면서도 미처 호른스트라사와의 계약서에 독소조항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라르만스. 자신보다 더 나은 능력을 가진 식구 덕분에 자신에게 유리해 보이는 계약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호른스트라사에서 자그마치 20톤에 달하는 어마무시한 양의 고지방 에담 치즈가 도착하면서 라르만스의 사업도전은 위기에 처한다. 아니 이걸 어떻게 다 팔지?
무엇보다 지난 30년 동안 월급쟁이로 매달 통장에 따박따박 꽂히는 월급의 노예였던 라르만스는 장사꾼의 기질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호른스트라사의 유통책이라는 직책과 앞으로 벌어들일 돈에 대한 유혹 때문에 49세 중년 남자의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다. 큰형님 의사 라르만스는 처음부터 동생 라르만스의 실패를 정확하게 예견했고,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라르만스의 실패는 예고된 재앙이었다. 어마무시한 20톤이나 되는 에담 치즈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그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유통기한이 정해진 제품을 보관하기 위한 냉장 장치가 설비된 창고가 그에게는 필요했지만 사전에 생각하지 못했다. 사무실도 비용을 아끼기 위해 자신이 사는 집에 마련했다. 시간이 돈이라는 걸 알면서도 중고 책상과 타자기를 사기 위해 일주일을 허비했다. 치즈를 팔기 위해서는 유통망이 필요했는데 그에 대한 준비도 전무했다. 부랴부랴 중개상 수배에 나섰지만, 책임감 있게 자신을 대신해서 치즈를 팔아줄 사람은 구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라르만스는 배수진을 친다는 의미에서 조선소를 과감하게 때려 치우려고 했으나 식구와 형님의 만류로 일단 자발적인 신경증 환자가 되어 3개월짜리 무급병가를 냈다. 아무리 신경증 환자라고 하더라도 조선소 사람들의 눈에 띄어서는 안되기에 스파이처럼 비밀리에 움직여야 했다. 세상에 이런 악조건을 업고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문제 아닐까? 재밌는 장면 중의 하나는 조선소에서 그의 존재감이었다. 헨리 사장님에게 보고하지 않고, 장기 무급병가를 처리하겠다는 제안을 들어 보니 라르만스는 조선소 사무실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게 아닌가 말이다. 요즘 세상이라면 당장에 정리해고 대상 1호가 되지 않을까 싶다.
결국 라르만스의 일탈적 치즈 사업이 실패로 귀결되고, 그는 다시 자신의 원래 직장으로 조기 복귀한다. 모든 직장인이 꿈꾸는 그런 일탈을 라르만스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최소한의 손실로 틀어막는데 성공했다.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자면 소중한 인생경험을 한 것으로 퉁치자고 할까. 원래 상태로 복귀한 라르만스는 얀과 이다 그리고 식구와 더불어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그런 삶을 지속하게 되리라.
우리 현대인에게 ‘만족’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 절대 만족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무언가를 사기 위해 노동하고, 돈을 벌어들이고, 그 돈으로 끝없는 소비를 하게 된다. 그리고 작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탈을 꿈꾼다. 누군가는 그 일탈을 성공으로 이끌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러지 못하겠지.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웠던 프란스 라르만스의 실패 이야기가 누군가를 주저앉히는 이야기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