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골드 - 이슬람 제국의 '새하얀 금' 백인 노예들의 잊혀진 이야기 가일스 밀턴 시리즈 5
가일스 밀턴 지음, 이충섭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오래 전 문자로 이루어진 책은 거의 유일한 정보 전달의 수단이었다. 21세기에는 인터넷과 그에 기반한 너튜브가 그동안 책이 수행해온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아니 대신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니라 거의 완벽하게 대체가 되었던가. 동영상 컨텐츠로 만나게 되는 신속한 정보는 몇 시간 아니 며칠 걸려 읽는 책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올드패션 스타일의 우리 책쟁이들은 책을 포기할 수가 없다. 이런 걸 더딤의 미학이라고 해야 할까. 느린 속도로 수집하는 지식과 정보들을 나는 더 좋아한다.

 

대중역사가 가일스 밀턴과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어느 날 문득 사무라이물이 읽고 싶어졌고, 중고서점에 가서 사무라이키워드로 검색해 보니 <사무라이 윌리엄>이 떴다. 그 책은 17세기 초, 일본에 상륙하게 된 영국 출신 사무라이 미우라 안진(윌리엄 애덤스)의 일대기였다. 가일스 밀턴이 저술한 책들이 궁금해져서 하나하나 컬렉션을 시작했다. <사무라이 윌리엄>을 읽고 나서 <향료전쟁> 그리고 <화이트 골드>를 읽기 시작했는데 후자를 먼저 읽었다.

 

<화이트 골드>에서 저자 가일스 밀턴은 역사의 페이지에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화이트 골드, 백인노예들의 처절한 삶의 추적에 나선다. 아니 백인노예가 있었다고? 노예하면 아프리카에서 북아메리카로 끌려간 흑인노예들 이야기가 아니었나? 수세기 동안 지중해 연안에서 맹활약한 이슬람 바르바리 해적들에게 영국과 네덜란드, 에스파냐 유럽 각지의 선박들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배에 실린 화물들 외에도 그들이 진짜 노리던 상품(?)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백인노예들이었다.

 

저자 가일스 밀턴은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도서관에서 수많은 자료들을 섭렵했다. 당시 편지들은 물론이고, <화이트 골드>의 지분을 양분한 영국 웨스트컨트리 콘월 펜린 출신의 백인노예 토머스 펠로우의 일대기의 상당 부분을 참조했다. 이렇게 멋진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료 조사를 위한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새삼 실감했다.

 

171511살 짜리 꼬마 토머스 펠로우는 집에서 얌전히 라틴어 공부나 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원양 항해에 나섰다. 그의 꿈이 물거품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선장인 삼촌 존 펠로우의 배에 올랐타가 살레 해적에게 포로가 되어 자그마치 23년이나 되는 노예생활을 하게 됐다.

 

살레 해적들은 당시 모로코의 술탄이었던 물라이 이스마일의 사주를 받아 백인노예들을 납치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심지어 영국 본토에까지 가서 노예사냥을 벌였다. 살레의 노예시장에서 두당 35파운드에 팔린 백인노예들은 이른바 노예우리에 갇혀 상상을 초월하는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게 된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유인이었던 꼬모 토머스 펠로우의 운명을 생각해 보라.

 

토머스 펠로우의 23년 간의 노예생활이 <화이트 골드>의 한 축을 차지한다면, 그를 포로로 잡은 술탄 물라이 이스마일의 엽기적 행태도 이 책을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가 분명하다. 오스만 투르크를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렇듯 물라이 이스마일 역시 왕위계승 과정에서 골육상쟁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만한 형제 친지들을 모조리 학살해 버렸다. 그가 부리던 검은 친위대는 술탄의 명령에 절대복종했다.

 

바르바리 해적들이 잡아온 여자 백인노예들은 자신의 하렘에 넣었고, 쓸만한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판단한 남자노예들은 모두 제국의 수도 메크네스의 화려하고 웅장한 성곽 건설에 동원됐다. 술탄의 비인도적 처사는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저자의 서술에 따르면 술탄의 잔혹함이야말로 어쩌면 제국의 통치하는 원동력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자식의 자식이라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건장한 흑인 노예를 동원해서 어쩌면 자신의 후계자가 될 지도 모를 아들의 목을 부러뜨리는 장면에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영국을 필두로 한 서방국가들에게 바르바리 해적들의 존재는 눈엣가시 같은 게 아니었을까. 영국에서는 노예로 잡힌 자국의 포로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수차례 특사들을 메크네스에 파견해서 술탄의 비위를 맞추고, 해상에서의 협상협상을 진행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물라이 이스마일은 수차례 협상의 갱신과 파기를 번복했다. 듣기만 해도 짜증나는 군주가 아닌가. 게다가 무슬림 통치자들은 대다수가 기독교도들인 백인노예들의 개종을 재미삼아 시도했다. 백인노예들이 반항할수록 그들이 실시하는 족발치기같은 가혹한 고문은 지속됐다. 우리의 어린 포로 토머스 펠로우 역시 고문과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배교자가 되었다.

 

포로석방 협상에서 이런 배교자들은 제외가 되었다. 강제의 의한 배교에도 불구하고, 그런 점들은 고려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형식주의야말로 현대 외교에도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부조리가 아닐까 싶다. 토머스 펠로우는 이십대 무렵에 강제로 결혼해서, 그곳에서 딸도 낳고 어려서부터 배운 아랍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면서 젤라바를 걸친 배교자 백인노예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술탄의 신임을 얻어 백인노예 출신 용병이 되어 술탄에게 반항하는 제국의 이곳저곳을 진압하기 위해 각지를 누비기도 했다. 그러다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 고향 펜린을 잊지 못해 탈출 시도도 해봤지만, 모두 실패로 귀결됐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악랄한 독재자 물라이 이스마일의 죽음과 그에 이어진 후계자간의 내전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결국 토머스 펠로우는 영원히 살 것 같았던 물라이 이스마일의 사후, 아내와 딸이 죽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몸이 된 상태에서 결국 모로코를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영국령인 지브롤터를 걸쳐 런던 그리고 마침내 23년 만에 고향땅인 펜린을 밟는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토머스 펠로우가 포로가 된 지 근 100년 만인 18168월 펠로우의 사돈의 팔촌 조카 뻘 정도되는 에드워드 펠류가 이끄는 영국 대함대가 북아프리카 백인노예 무역의 거점도시인 알제를 공격해서 수백 년에 걸친 노예무역을 종식시키는데 성공한다. 영국인들에 이어 들어온 프랑스인들이 알제리를 식민지로 삼아 새로운 형태의 노예시스템을 가동시키는 건 그 후의 일이었다. 어쨌든 에드워드 펠류의 활약으로 트리폴리와 알제 그리고 살레 일대의 백인노예 무역을 일소할 수가 있었다. 토머스 펠로우의 후예들은 그 뒤로 노예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떨쳐 버리고 바다로 자유롭게 나갈 수가 있었다.

 

최근 소말리 해변을 중심으로 활약 중인 21세기 해적단의 모습을 보면서 권력과 행정의 공백기를 파고드는 무법자 해적들의 실체를 엿보게 됐다. 18세기 초반, 비슷한 궤적의 그리던 살레의 해적들은 아예 권력집단과 결탁해서 해상에서의 자유로운 무역을 방해하고 선박에 탑승하고 있던 백인들을 포로로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먹었다. 이 책의 제목인 화이트 골드가 암시하듯이 해적드에게 포로로 인간들이야말로 수지가 맞는 상품이었다. 술탄 물라이 이스마일은 그들을 동원해서 정치적 경쟁자들을 제거할 수가 있었고, 그들이 보유한 무기 제작기술 혹은 건축술로 자기가 건설한 술탄 제국의 질서와 안녕을 모도했다. 또 서방 제국들이 비싼 몸값을 내고 자국 출신의 노예들을 되산다고 하면서 술탄의 비위를 맞추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 않았을까.

 

서사의 다른 축에서 토머스 펠로우라는 기구한 운명의 사나이를 배치해서 사실감을 더하는 작법으로 가일스 밀턴은 독자들을 매혹시켰다. 과연 글 좀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아쉬운 건 토머스가 펠로우가 고향에 도착한 다음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빠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위키피디아를 검색해 보니 펜린으로 돌아온 토머스는 고향에서 돌아온 영웅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 모든 것이 낯설 뿐이었고 부모님마저 그를 알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고향 펜린이 낯설었고, 오히려 그가 노예 생활을 했던 메크네스가 더 그에게 편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고향으로 돌아온 지 7년 뒤인 1745년에 토머스 펠로우는 죽었다. 눈물과 고통의 아라비안 나이트가 그렇게 끝났다.

 

윌리엄 애덤스/미우란 안진의 경우처럼 익숙한 고향을 떠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디아스포라 같은 삶을 산 문제적 인간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동질감을 느꼈다. 아울러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건을 무대에 올렸다는 점도 높게 평가하고 싶다. 과연 멋진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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