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된 영웅 관우 더봄 평전 시리즈 4
마바오지 지음, 양성희 옮김 / 더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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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중국 학자가 쓴 삼국지연의의 영웅 관우 평전을 읽었다. 아마 삼국지 최고의 영웅 중의 하나인 관운장을 모를 사람을 없을 것이다. 30년 간 교단에서 역사를 가르쳐 왔다는 마바오지 선생은 관우 평전에서 관운장의 신화를 재조명한다.

 

일찍이 어느 작가는 나관중의 대하 역사소설 <삼국지연의>가 사실 3, 허구 7이라는 평가를 했던가. 삼국지연의가 다루는 역사가 아주 허구라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 재미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마바오지 선생은 그에 반해서 그 정도는 아니고 역사와 허구가 반반정도 되지 않나 하는 이견을 제시한다. 전문적인 역사가가 아닌 독자 입장에서 볼 때, 그 정도면 적당하지 않나 싶다.

 

황건적의 난과 환관의 발호 그리고 군벌의 난립으로 난세였던 후말 말기, 도원결의를 통해 유관장(유비-관우-장비) 삼총사가 역사에 등장한다. 그런데 저자는 시작부터 주작이라고 지적하고 나선다. 무엇이든 서사의 시작은 화끈한 게 좋으니, 황건적 무리에 맞서기로 결의한 유관장 삼형제의 기원을 복사꽃 만발한 도원에서 비록 다르게 태어났지만 죽을 때에는 같이 죽자라는 작당을 <삼국지연의>의 시작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화끈한 시작이 있단 말인가.

 

중산정왕의 후예라는 주장을 내세운 유비 집단의 무력을 담당한 것이 바로 관우와 장비였다. 그들에게 훗날 라이벌(?)이 되는 조조나 원소와 달리 이렇다할 근거지나 삼공 출신의 후예라는 집안의 빽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군벌이자 보수주의자 유비는 요즘으로 치면 자수성가의 롤모델일 지도 모르겠다.

 

동탁군과의 대결에서 <온주참화웅> 고사로 관우의 이름을 천하에 떨쳤다고 연의는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 화웅은 손문대(손견)가 격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것 또한 관우 전설이 있게한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공의 시작부터 의구심이 드는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주군이자 형제 유비와 떨어져 조조 수하에 의탁하게 된 관우는 중원을 두고 원소군과의 백마전투에서 원소군의 맹장 안량을 패퇴시키는 공훈을 세웠다. 조조는 이에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로 봉했다고 한다. 관우는 조조 수하의 장문원(장료)에게 자신은 조조를 섬길 수가 없고, 유비에게로 갈 거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이후 <오관육참>으로 알려진 고사를 통해 조조를 떠나 유비에게로 떠났다.

 

마바오지 선생은 오관의 위치를 고증하면서 원소군 휘하에 있는 유비에게 가기 위해 일부러 길을 돌아갈 필요가 있겠냐는 말로 오관육참의 허구성을 타격한다. 그리고 아무리 조조가 관우가 유비에게 복귀하는 것을 허용했다고 하더라도, 자군의 장수들을 해치도록 허용했다는 말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쨌든 이 일을 통해 관우는 자신의 주군에게 충의를 지키는 인사라는 세간의 평을 얻었고, 조조는 그 이상으로 배포가 큰 주군이라는 사실을 알리는데 성공했다.

 

유비 군단은 이후 서주와 신야에서 조조군의 공격에서 잇달아 패배하고 큰 위기에 봉착한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삼고초려로 영입한 제갈량의 활약으로 형주를 노리고 남하한 조조 군단을 막기 위해 강동의 손권과 동맹을 맺고 그 유명한 적벽대전을 거치면서 비로소 형주에 거점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관우는 신야 전투에서 후퇴하는 유비 군단의 후위를 맡아 시간을 벌고 역전의 무대를 마련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세웠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후퇴하는 조조군을 화용도에서 조우한 관우가 예전에 받은 후의 때문에 조조를 살려 보냈다는 이야기 역시 허구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어쨌든 적벽에서 조조의 남하를 막아내는데 성공한 유비와 손오 연합군은 바로 적대적 분열에 직면하게 된다.

이유는 형주라는 전략 요충지의 주인이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한 다툼이 원인이었다. 서주 이래 거점 형성에 성공한 유비 집단이 형주를 손오에게 반환할 리가 없었다. 손오는 손오 대로, 조조군의 남하를 거의 자력으로 저지했는데 유비 집단이 숟가락 하나 얹어서 형주를 그대로 집어 삼키는 걸 묵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강경파인 주유는 영토 할양에 결사반대했다. 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노숙은 조조를 상대하기 위해 유비에게 형주 할양을 허용했다.

 

유비는 형주를 관우에게 일임하고, 나머지 잔여집단을 거느리고 유장이 다스리던 서천 정벌에 나선다. 주군 유비에게 가절월을 받아 전권을 행사하게 된 관우의 명성이 중원에 진동하기 시작했다. 한중까지 장악하는데 성공한 조조는 우금과 방덕에게 칠군을 주어 관우가 지키는 형주 공략을 명령한다. 하지만 관우는 수공으로 칠군을 격파하고, 조조가 수도인 허창을 옮길 생각할 정도로 위력을 과시했다. 이에 조조는 손권과 동맹해서 손권이 관우의 배후를 노리게 유도했다. 그리고 군수품 보급 문제로 미방과 부사인 등에게 가혹한 처벌을 공공연하게 언급하던 관우는 아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오군의 포위 공격에 그만 맥성에서 아들 관평과 포로가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원래 무인이었던 관우는 사후 곧바로 제후의 반열로 추증되기 시작했다. 유가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경전을 접한 것으로 알려진 관우가 조조의 휘하에서 춘추를 읽었던 고사 덕분에 중국 각지에 춘추루라는 이름의 누각이 등장했다. 중원의 지배집단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던 충의와 용맹의 상징성을 확보한 관우는 제후의 반열을 넘어 거의 신급 존재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맥성 포위전에서 비참하게 오군에게 포로가 되어 살해당했기 때문에 악귀로 분류되던 관우의 이미지는 오랜 세탁 과정을 거쳐 선귀가 되었고, 뒤이어 재물신의 위치까지 확보하게 된다. 유가는 물론이고 도교와 불교에서까지 인정받는 일약 중원의 스타가 되었다고나 할까. 심지어 남아프리카까지 관우의 묘가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1599년에 세워지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동묘는 해외에 만들어진 첫 번째 관묘라고 한다.

 

마바오지 선생은 삼국지연의에 묘사된 소설적 모습을 걷어내고, 거의 신격화된 관우 신화의 실체 고증에 주력하는 모습을 이 책을 통해 보여주었다. 전장에서 가장 강력한 전사의 이미지를 보여준 관운장 활약상의 대부분이 소설화되었다는 점에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역사와 대하 역사소설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수긍이 갔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동묘를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좀 선선해지면 한 번 가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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