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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나는 아주 오랫동안 <중경삼림>의 첫 번째 에피소드보다 두 번째 에피소드가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두 번째보다 첫 번째가 더 낫지 않나 싶은 쪽으로 생각의 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두 개의 이야기 모두 매력적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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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663(양조위 분)과 페이(왕정문 분)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중경삼림>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마마스 앤 파파스>의 노래 <캘리포니아 드리밍>에 대한 이야기를 빼면 아마 이야기가 반쯤 덜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럴 정도로 페이는 이 노래에 미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콩의 중국 반환을 3년 앞둔 1994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이 홍콩의 밤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아마 그 때만 하더라도 공산주의 정권과의 기묘한 방식의 동거가 결국에 가서는 강력한 억압과 족쇄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항상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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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는 사촌오빠의 가게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의 새로운 점원이다. 그녀는 첫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 하지무와 잠시 대면하고 곧바로 주변을 순찰하는 경찰 663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경찰 223과 663의 공통점은 바로 둘 다 경찰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최근에 실연했다는 점도.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사장은 영업 신장을 위해 맨날 스튜어디스 애인에게 샐러드만 사다 주는 663에게 생선튀김도 한 번 사다 주라고 권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피자도 권했던가. 이게 사단이 되어, 무더울 여름날 하이네켄 맥주를 즐겨 마시던 스튜어디스 애인을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가 버렸다. 이런 경우엔 사장님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 음식에도 이렇게 많은 종류가 있다는데 사랑은 아마 말할 필요도 없었겠지. 663의 여자친구는 바로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난다. 편지 한 통과 집열쇠를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 남겨둔 채.
가게 점원들은 사장을 필두로 해서 모두 편지를 뜯어서 본다. 그리고 페이에게 그 내용을 전달할 임무를 맡긴다. 663은 편지를 잠시 맡아 달라고 말한다. 그 다음부터 우리가 잘 아는 페이의 663 집의 유쾌한 침투작전이 시작된다. 그 시절에는 재밌게 보던 일들이, 시간이 지나고 보니 지금은 모두 범죄였다! 놀랍지 않은가. 우선 타인의 편지를 훔쳐보면서 개인정보보호법을 위반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건, 페이가 663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했다는 거다. 이건 주거침입죄에 해당한다.
<중경삼림>에는 왕정문(혹은 왕비)이 부른 <몽중인>(Dream Lover)이 두 번 등장한다. 한 번은 663의 집에 페이가 무단침입하던 중에 한 번 그리고 엔딩 컷에서 한 번. 음악을 들으면서 약간 전율했다고나 할까. 이제는 지나가 버린 오래전 청춘의 기억이 떠올라서가 아닐까 싶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663과 사랑에 빠진 페이는 열쇠로 그의 집을 무시로 드나들면서 재밌는 행각을 벌인다. 그러니까 전 애인인 스튜어디스 주가령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한 것이다. 피그말리온은 갈라테아를 만들었지만, 페이는 스스로 갈라테아가 되고자 한 걸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라고 결국 663의 집에 맘대로 드나들던 페이는 결국 그에게 꼬리가 밟히고 만다.
삼십대 초반의 그윽한 눈빛의 양조위가 맡은 경관 663은 정말 사람 좋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노골적으로 자신에게 들이대는 페이의 무거운 짐을 들어 주기도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전 애인이 다시 돌아왔을 거라는 직감에 느닷없이 자신의 집으로 들이닥친 663은 집에 숨어 있던 페이를 찾아내지 못한다. 그건 좀 억지스러웠는데. 어쨌든 재밌긴 하더라.
자신만 바라보던 페이의 감정을 드디어 알게 된 이 남자는 페이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 어느날 밤 8시에 캘리포니아에서 만나자고. 그리고 페이는 캘리포니아 바가 아니라 스튜어디스가 되어 진짜 캘리포니아로 날아간다. 사촌오빠인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사장에게 663에게 편지를 한 장 건네주라고 했던가. 그리고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다음, 이전의 촌스런 단발에서 세련된 모습으로 변신해서 등장한 페이. 아마 경찰을 때려치우고, 페이의 사촌오빠에게 가게를 인수 받아 새로운 개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둘은 만나고, 다시 한 번 왕정문이 부른 <몽중인>이 흐르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처음 이 영화를 볼 적에는 그저 캘리포니아가 이상향으로 제시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캘리포니아는 고독하고 불안한 청춘들에게 유일한 탈출구였다.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지 않을까? 더 늦기 전에 얼른 홍콩에서 탈출해서 사시사철 태양이 내리쪼이는 곳으로 튀라고. 나중에 가서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으니, 시간과 기회가 있을 때 어서 자유롭게 살 길을 모색하라고 WKW가 영화 속에 숨겨둔 지령이었던 것이다.
페이가 663의 집에 가져다 들이 붓는 금붕어 역시, 홍콩이라는 시공간에 갇힌 그네들의 다른 상징으로 읽힌다. 페이가 663의 전 애인인 주가령의 흔적을 지우려는 부단한 노력도 애절하기만 하다. 돋보기를 듣고 침대 위에서 긴 머리카락을 찾아낸 페이는 633이 즐겨 찾는 식당에서 일하는 웨이트리스의 머리를 들춰 보기도 한다. 이 정도면 편집증 아닌가? 한편으로는 우스워 보이는 장면들도 심리학적 분석의 틀에 넣어 보면, 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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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그렇게 오래 흘러도 663 역을 맡은 양조위의 눈빛 연기는 참 인상적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왕정문이 부른 <몽중인>의 전율을 일으키는 기타 사운드는 최고였다. 동경의 대상이던 공간이 홍콩이 예전 같은 모습을 잃어버린 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