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한중일 세계사 11 - 서남전쟁과 위구르 봉기 본격 한중일 세계사 11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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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일본의 세이난 전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순전히 만화 <바람의 검심> 덕분이었다. 그렇게 19년 전, 어줍잖게 만화에서 본 세이난 전쟁에 대해 일본 고베 부근의 다쿠미라는 곳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일본 교수님과 비루를 마시며 일본사에 대해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 사람이 자기네 나라 역사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점에 대해 교수님이 놀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 일본의 센고쿠 시대에 관련된 책들(주로 소설)을 읽으면서 일본사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그리고 굽시니스트 작가가 꾸준하게 펴내고 있는 본격 한중일 세계사를 통해 다시 한 번 세이난(서남) 전쟁을 만나게 됐다.

 

일본사람들은 메이지 유신을 근대화에 성공한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한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의 과정은 굉장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됐다. 농민들은 농민들대로, 그리고 무엇보다 사무라이 계급을 대변하는 사족들은 사족들대로 새로운 혁명 혹은 개혁에 반대했다. 특히 사족들은 기존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특권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에 대해 격렬하게 반항했다.

 

메이지 신정부는 이런 사무라이 사족들에 대한 개혁을 점진적인 방식으로 추진했다. 사실 전장에서 신식 총포에 맥을 추지 못하게 된 사무라이들의 칼은 무기가 아닌 의전용에 불과했다. 하지만, 신정부는 이런 칼도 사회 안정에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드디어 폐도령을 선포했다. 재밌는 건, 단 칼을 차고 다니는 건 안 되고 메거나 가방에 넣거나 혹은 입에 물고 다니는 건 허용했다고 한다. 과연 칼을 입에 물고 다니는 칼잡이들이 있었을지 궁금하다.

 

폐번치현과 폐도령 그리고 징병제 실시로 기존 사족들에 대한 기선제압에 성공한 메이지 신정부는 곧 국가의 근간이 되는 조세 작업에 착수한다. 신정부 초기 농민들은 현물이 아닌 현금으로 세금을 내야 했기 때문에 정부에 불만이 많았지만, 인플레이션으로 쌀값이 급등하면서 오히려 예전의 다이묘들에게 내는 세금보다 적게 낼 수 있어 신정부 정책을 환영했다.

 

이런 민심과 동떨어진 인식을 하고 있던 사족들은 사쓰마로 낙향한 유신삼걸 사이고 다카모리를 영수로 삼아 반란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강화도조약 다음 해인 1877년 결국 사쓰마의 사족들을 중심으로 반란이 시작됐다. 반란 초기, 사쓰마 반군들이 구마모토 성을 포위하며 승세를 탔지만, 신정부군의 물량 공세 앞에 역부족이었다. 이 당시, 일본인들이 군신으로 추앙하는 노기 마레스케(당시 연대장)는 자신의 14연대기를 반군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할복을 하려고 했으나, 상급 지휘관의 만류로 후일을 도모하게 되었다고.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모델이 사이고 다카모리였다고 한다. 신정부군의 압도적 화력과 병력 지원으로 6개월 만에 사쓰마 반군들이 출몰하던 규슈는 진압되었고, 사이고와 지휘부의 할복으로 서남전쟁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내전을 치르던 중에, 습한 기후 때문에 총포의 화약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자 사쓰마의 사무라이들이 칼을 들고 신정부군에게 돌격했다는 이야기는 신박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신정부군 측에서도 신선조에서 활동한 칼잡이들을 발도대로 구성해서 반군에 맞섰다고 하던가. <바람의 검심>에서 켄신의 라이벌이자 조력자로 등장한 사이토 하지메군도 볼 수가 있었다.

 

이후 다른 유신삼걸이었던 오쿠보 도시미치도 암살로 생을 마감하고, 그 후임자로 이토 히로부미가 내무경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사실 이토는 자신보다 경력이나 능력이 앞선 이들이 있었지만, 내부 알력으로 어부지리를 얻은 셈이었다.

 

어쨌든 일본은 서남전쟁을 마지막으로 해서, 내부에서 발생한 다양한 형태의 갈등들을 내전이라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처리하고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게 됐다. 물론 이 과정에서 태동된 조슈와 사쓰마 군벌이 일본 군부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처참한 패전으로 귀결된다.

 

다음 타겟은 조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청조의 통치 아래 있던 신강 지역 둥간 혁명이다. 중국 본토가 태평천국의 난으로 정신이 없었던 1860년대 섬간 지역의 조직적 무슬림 저항은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내면서 결국 진압되었다. 하지만 무슬림 봉기의 불씨는 동투르키스탄으로 옮겨갔고, 그 무대는 카쉬가리아였다. 청나라는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이라는 내우외환으로 그야말로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는 말처럼 청조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당시 청나 조정에서는 먹을거리는 없고 반란으로 골치만 썩이던 신강(동투르키스탄) 지역을 포기할 생각도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홍장의 해방파에 맞선 좌종당의 의견이 채택되면서 막대한 전비를 투입해서 우즈벡 출신 야쿱 벡의 무슬림 신생국가 카쉬가리아 원정에 나선다.

 


야쿱 벡은 원래 서투르키스탄 코칸트 출신의 무장이었는데, 순전히 시기를 잘 만나 무슬림 군주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자신의 본진인 코칸트는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으로 남하하는 러시아 제국에게 털려 버렸다. 야쿱 벡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게 정식으로 에미르 직위를 받고,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과 딜을 통해 생존을 도모했다. 심지어 청나라의 원정에 앞서, 교섭을 통해 청조에 신속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준비를 마친 좌종당은 자신의 무공을 세울 기회를 걷어찰 이유가 없었다. 결국 위구르 토벌전이 개시되고, 야쿱 벡은 자신의 정예군을 동원해서 청조의 군사들과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교전 및 확전 불가 지침을 전선에 잇달아 내리면서 자멸해 버렸다.

 

야굽 벡이 급사한 뒤에는 고질적인 내부 분열로 좌종당이 이끄는 청군은 투르판과 우루무치 그리고 카쉬가르 등 카쉬가리아의 중요 도시들을 석권하는데 성공했다. 섬감 둥간 혁명의 지도자였다가 위구르로 망명했던 백언호 등은 모두 러시아 제국으로 투항해 버렸다.

 

그나마 서남전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지만, 19세기 중반 중앙아시아 역사에 대해서는 정말 아는 바가 1도 없었다. 그래서 중국 서부에서 발생한 둥간 혁명과 위구르 봉기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은 정말 새로운 그런 느낌이었다. 역사의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만약 동투르키스탄이 러시아 영역에 편입되었다면 1991년 소련이 붕괴한 뒤 신강은 어엿한 독립국이 되지 않았을까? 지금 중국의 영토가 된 신강 위구르 지역은 중국이 21세기에 추진하는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고, 희토류 같은 천연자원과 면화 공급지로 각광받고 있다.

 

중앙아시아 역사를 다룬 김호봉 교수의 저작들에 굽시니스트 작가가 많이 기대고 있다고 하는데, 해당 작가의 책들을 한 번 찾아서 읽어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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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12-27 20: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이 시리즈 정말 꾸준히 읽으시네요~👍

레삭매냐 2021-12-27 20:58   좋아요 0 | URL
제가 중국 태평천국의 난과
일본 근대화 과정에 관심이
많은데, 굽시니스트 작가가
그 부분을 아주 디테일하게
다뤄 주셔서 열심으로 읽고
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