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평점 :
책으로 이어진 인연으로 어느 작가를 알게 됐다. 그리고 난 그 책을 또 다른 지인에게 선물했다. 재밌는 건, 나에게 그 책을 선물한 이가 그 사실을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역시나 무당파 조사인 장삼봉 선생 앞에서 태극권을 전수받던 장무기 생각이 떠오른다. 선행은 그렇게 베풀고 잊어야 하는 것이다.
조남주 작가의 소설집 <우리가 쓴 것>에는 모두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그 중에서 나는 예전에 어느 소설집에서 만났던 <현남 오빠에게>부터 다시 읽었다. 다시 읽어도 강현남 그놈은 나쁜 자식이더라. 근데 왜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마치 너튜브의 고민 상담소가 생각이 났을까? 한참 주가를 올리던 소문난 너튜버에게 진작에 자신의 고민을 상담했다면, 십년이라는 세월 동안 자신을 개스라이팅한 유사 남자친구에게 시달릴 일이 없었을 텐데. 상대방을 사랑한다며, 자기 마음대로 미래의 배우자에게 직업과 살곳을 비롯해 모든 것을 강제하다니... 21세기에도 여전히 그런 일들이 횡행할 수도 있다는 가정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첫 번째 단편인 <매화나무 아래>를 읽는다. 여기서 나는 충격적인 문장을 하나 발견했다. ‘늙는 것도 병’이다라는 문장이었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생로병사를 피할 수 없는 그런 유한한 존재다. 아마 영맨들이라면 노(老)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으리라. 그저 아름다운 현재의 삶이 즐거울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어느덧 나이가 들어 병이 들고 자신의 건강 그리고 정신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되는 순간이 오리라. 아니 우리 모두는 그걸 알면서도 굳이 내색을 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우리 인간은 모두 위선적인 존재일 지도 모르겠다.
<오기>에서는 주변의 모든 걸 작품의 소재로 삼을 수 있는 작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보니 최근에 어느 작가는 사적인 대화를 소설로 만들었다가 진실이 드러나 뚜까 맞았다지 아마. 그런데 모든 게 내 입에서 튀어 나가는 순간, 그건 비밀의 틀에서 벗어나게 되는 게 아닐까? 요즘 읽고 있는 스페인 작가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새하얀 마음>에서도 나만 아는 비밀이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말하고 있지 않던가. 어쩌면 클리셰일지도 모르겠지만, 소설에 비밀이 존재할 수 있던가. 아니 나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드는 것보다 더 두려운 건, 내가 신뢰한 사람이 어느 순간 적으로 돌아서는 게 더 무섭지 않을까.
아버지의 출가 아니 가출을 다룬 <가출>은 가장 유쾌하게 읽은 작품이다. 주로 애들이 가출을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아마 수십 년 동안 가장의 무게를 이길 수가 없었던 주인공의 아버지는 어느 날 가출을 감행한다. 그리고 보니 이웃 일본에서도 멀쩡하게 출근한다고 집을 나선 가장이 아예 실종되어 버리기도 했다지. 자신을 내리 누르는 삶의 무게에 지치다 보면, 모든 걸 훌훌 털고 그렇게 떠날 수도 있구나 싶은 설정이 가슴을 콕콕 찍어 누른다. 집 나간 사람은 집 나간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지론의 주인공 엄마는 대책 회의를 위해 모인 자식들을 위해 밥을 안치고 찬거리들을 분주하게 만들어낸다. 주인공의 오빠는 집 나간 아빠 걱정을 하는 척하면서 밥을 두 공기나 흡입해 버린다. 이 장면이 어찌나 웃기던지. 이런 디테일을 포착해낸 작가에게 이 자리를 빌어 경의를 표한다. 치매가 와서 나간 것도 아니고 ‘자기 앞가림을 잘 하시겠지’하며, 남은 식구들의 우애는 시간이 갈수록 깊어져 간다. 결말이 어떻게 되더라. 하긴 이런 서사에 결말 따위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미스 김은 알고 있다>에서는 예전에 비정규직으로 회사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척척 해내던 미스 김 역의 김헤수가 자동으로 떠올랐다. 드라마 제목이 아마 <직장의 신>이었지. 실상은 정규직 못지않은 능력에 정규직들을 능가하는 업무 능력의 소유자지만 자의로 비정규직을 원하는 미스 김의 활약상을 그린 드라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끝까지 보지 않아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작가는 역설적으로 회사라는 조직에서 가장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업무들을 처리하지만, 막상 그 일을 하던 이가 사라졌을 때 벌어지는 일들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마치 우리가 물과 공기의 중요성에 대해 1도 생각하지 않고 살지만, 막상 물과 공기가 없어진다면 바로 생존의 위기라는 걸 모르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미스 김의 소소한 복수는 귀엽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자신의 버킷 리스트 중의 하나인 오로라를 보러 가기 위해 대장정에 나서는 서사도 마음에 들었다. 우리네 부모님들은 당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해야 했기에 자신을 죽이고 그렇게 살아 오셨다. 하지만 신세대 노인들은 당당하게 말한다. 손주 새끼 보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딸이 어렵게 아이를 기르는 건 잘 알지만 또 그래도 그만큼 오로라를 보고 싶은 욕망도 강했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손주는 다음에도 봐줄 수 있지만 오로라는 평생에 한 번 볼까말까한 것이고 그렇게 보고 싶었다면... 우린 그렇게 양자택일의 순간에 선택을 강요받는다. 모를 일이다 그래.
대미를 장식하는 건 역시나 코로나 시절 너무 일찍 찾아온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제목부터 멋지다, <첫사랑 2020>이라니. 2020에도 첫사랑이 있구나 싶다. 역병의 시대에 꼬맹이들은 서로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사귀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주변의 여건이 그럴 수가 없다. 작은 여행사를 운영하시는 아버지의 일감이 코로나로 없어지니 당연히 수입이 줄고, 그러면 학원도 마음 대로 갈 수가 없다. 같은 학원에 다녀야 썸 타는 친구와도 만나고 그럴 수가 있는데 그럴 여건이 되지 않는다. 안경 위로 솟아오르는 김처럼 갑갑한 이야기들이다.
조남주 작가의 <우리가 쓴 것>에는 평범하면서도 동시에 특별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평범하지만 무언가 울림이 있는 이야기들을 픽업해 내는 작가의 기술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물어 없이 고구마 한 자루를 먹고 있는 듯한 경험도 곳곳에서 했지만 말이다. 전반적으로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