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덴 대공세 1944 - 히틀러의 마지막 도박과 제2차 세계대전의 종막
앤터니 비버 지음, 이광준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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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전사를 즐겨 읽었다. 중학교 시절, 친구네 집에 가서 본 타임라이프에서 출간된 <World War II>를 보고 얼마나 부러웠던지.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어 종종 가서 보곤 했었다. 나중에 커서는 절판된 시리즈들을 권당 오천 원씩 해서 모으기도 했다. 며칠 전에는 너튜브에서 요즘 한창 구독 중인 과달카날과 뉴기니 전투를 다룬 책을 인천집에서 공수해다 보기도 했다.

 

국내에 소개된 <스페인 내전><스탈린그라드>로 유명한 전사전문가 앤터니 비버의 <아르덴 전투 1944>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바로 구입을 결정했다. 예전에 <디데이> 케이스도 있어서, 혹시라도 절판이라도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전사를 다룬 책들은 단가도 제법 나가고, 또 밀덕들이 다 구매하고 나면 자연스레 절판되는 그런 운명이라고나 할까.

 

앤터니 비버 작가는 친절하게도 미영 연합군이 스탈린의 요청대로 유럽에서 제2전선을 열어제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래, 약사를 소개한다. 팔레즈 포켓 포위전에서 서부유럽 주둔 독일군에게 강력한 타격을 입힌 연합군은 곧 파리를 해방시키고 그야말로 질풍노도 같은 추격전을 개시해서 독일군을 패퇴시키는데 성공했다. 19449월에 몽고메리의 어설픈 마켓가든 작전으로 낭패를 보긴 했지만 대세는 압도적 물량을 앞세운 연합군 쪽으로 기울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휘트르겐 숲 전투에서 선봉을 맡았던 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그동안 몰랐지만, 휘트르겐 숲 방어전에 나선 독일군이 그렇게 악착같이 싸웠던 건 바로 다음에 예정된 독일의 마지막 공세였던 아르덴 전투를 위한 것이었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그런 사실을 알고 나니, 신병 위주로 구성된 미군이 베테랑 독일군들을 상대하면서 고전한 게 이해가 됐다.

 

이제 진짜 독일 본토인 아헨 전투에서 나치 천년제국을 그동안 주창해온 나치당의 지도자들은 총통 히틀러의 현지 사수 명령을 무시하고 안전한 후방으로 후퇴를 거듭한다. 이 때 이미 독일의 패망은 예정되었던 게 아닐까.

 

상당 부분을 아르덴 전투 이전의 상황 설명에 투자한 앤터니 비버는 이제 본격적인 아르덴 전투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노르망디 상륙 이래, 벨기에의 앤트워프 항을 점령하기 전까지 이렇다 할 보급항을 확보하는데 실패한 연합군의 보급로는 길어질 대로 길어졌다. 레드볼 익스프레스라는 이름으로 연합군 보급대는 전투에 꼭 필요한 연료와 탄약 그리고 식량을 전선으로 실어 날랐지만, 엄청난 피로가 쌓이는 작전이었다. 독일군은 그동안 공간을 내주고 기갑부대의 재정비와 병사들의 휴식을 위한 시간을 벌었다. 마켓가든 작전에서도 아른험 부근에서 정비 중이었던 독일 기갑사단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했던 것처럼, 연합군 진영에서는 이제 곧 전쟁이 끝날 거라는 낙관론이 우세했다.

 

4년 전, 만슈타인의 낫질작전처럼 이번에도 히틀러는 벨기에의 아르덴 숲을 지나 연합군의 보급창이 있는 리에주 더 나아가 뫼즈강 건너로 연합군을 몰아내려는 대공세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를 원했다. 참고로 프랑스 침공 당시,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제7기갑사단은 단 이틀 만에 뫼즈강에 도달했다고 한다. 제공권을 장악한 연합군의 공중공격을 피하기 위해 악천후와 울창한 아르덴 숲을 선택한 것이었다. 아르덴 공세를 위해 히틀러는 극도의 비밀유지 아래 동부전선에서 병력을 서방으로 이동시켰다. 독일군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기갑부대의 운용을 위한 연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점이다. 거의 무한대로 연료의 보급이 가능했던 연합군과 달리 선봉에 서서 연합군 전차부대를 상대해야할 독일 기갑부대는 진격에 반드시 필요한 연료 수급이 결국 그들의 발목을 잡게 된다.

 

영화 <벌지대전투>에서는 독일군의 침공에 대비하지 못했던 미군의 카산드라 같은 역할을 맡았던 카일리 소령이 강 위에 둥둥 떠내려가는 빈 드럼통을 보고 독일군의 연료부족을 눈치 채는 장면이 나오는데, 상당히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아돌프 히틀러와 다스 라이히 같은 정예 친위기갑사단이 포함된 18개 사단이 동원된 독일의 아르덴 공세는 19441216일 시작되었다. 선봉을 맡은 요아힘 파이퍼가 지휘하는 파이퍼 전투단은 항복한 비무장 미군 포로들을 곳곳에서 총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실 보병부대가 뒤따르지 않는 상태에서 쾌속의 진격을 해야 했던 기갑부대가 포로들을 후방으로 보내거나 그럴 여력이 없었던 건 사실이다. 특히 독일군 가운데서도 스스로 엘리트 부대를 자랑하는 친위대의 독불장군식 부대 운용은 아군이었던 독일 국방군 입장에서도 불편했다.

 

말메디에서 포로가 된 미군들을 학살한 친위대의 만행 소식을 전해들은 미군들은 독일군 포로, 특히 친위대 포로들은 잡지 않겠다고 맹세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후과로, 양측 모두 항복하면 죽음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전장에서 더욱 치열하게 마지막 순간까지 싸울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독일군의 포로 학살은 공세 초기 수세에 몰린 미군의 결사항전을 이끌어내게 되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전략적 오판이었다.

 

독일군의 이런 대공세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12집단군 사령관 브래들리를 비롯한 미군 지휘부에게는 충격이었다. 저자가 정치군인이라고 평가하는 연합군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는 아군이지만 독일 진격전에서 경쟁 레이스를 펼치던 영국군 원수 몽고메리를 달래면서, 또 한편으로는 거의 모든 전선이 돌파된 아르덴 전역을 수습해야 하는 골치 아픈 임무가 주였다.

 

신병 캠프에서 나와 최전선에 배치된 초짜 미군들은 중화기와 티거 전차로 무장한 베테랑 독일군에게 그야말로 처참하게 당했다. 미군에게는 당장 아르덴 지역에 증파할 여유 병력이 없었다. 그래서 마켓가든 작전 이래, 후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82공수사단과 101공수사단을 각각 장크트비트(생비트)와 전략거점인 바스토뉴에 비행기 대신 트럭에 실어 파견했다.

 

HBO 전쟁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도 나오는 것처럼, 전방으로 향하는 공수 506연대 2대대 이지 컴퍼니 중대원들이 후방으로 패주하는 미군과 트럭에서 조우하는 장면이 이제는 바로 이해가 됐다. 비록 압도적인 독일군의 공격 앞에 패주하기는 했지만, 일선의 보병사단들이 뫼즈강으로 쾌속의 진격을 원하던 독일 기갑부대를 막아 주면서 공수부대들이 생비트와 바스토뉴에 방어거점을 확보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훗날 유명한 작가가 되는 커트 보네거트도 이 전역에서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훗날 드레스덴 대폭격의 증인이 되기도 했다. J.D. 샐린저도 당시 아르덴 전투는 물론이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는 유타 해변에 그리고 휘트르겐 숲 전투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이미 당시에도 유명했던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전장에 있었는데, 활약보다는 기행이나 말썽으로 더 유명했던 것 같다.

 

여하튼 치열했던 아르덴 전투에 대해서는 통사적 시점에서 이 책에 자세하게 원인과 경과들이 연대순으로 잘 소개되고 있다. 그동안 몰랐지만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점의 하나는 9월 아르덴에서 후퇴했던 독일군이 다시 진주하면서 벨기에 시민들의 레지스탕스 운동에 대해 잔혹한 복수를 했다는 점이다. 보급이 부족했던 독일군이 벨기에 사람들의 귀중한 식량을 약탈한 것은 물론이고, 징병 연령대의 남자들을 잡아서 총살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아르덴 곳곳의 작은 마을들을 두고 미군과 독일군이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부수적 피해가 무수히 발생하고 많은 벨기에 피란민들이 격전지가 된 고향을 떠나야 했다.

 

주공을 맡아 큰소리 뻥뻥치던 친위대 상급대장 제프 디트리히의 제6기갑군과 오토 레머의 총통 경호여단 등은 아르덴 전역에서 기대한 만큼의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이미 독일군 선봉을 맡았던 파이퍼 전투단이 곳곳에서 연합군에게 저지당하고 연료부족으로 전차부대의 운용이 어려워졌을 때, 어쩌면 아르덴 공세는 실패했던 게 아닐까. 남쪽에서는 맹장 조지 패튼이 이끄는 제3군의 3개 사단이 독일군의 3개 사단에 포위된 바스토뉴를 구원하기 위해 맹진격을 하고 있었다.

 

바스토뉴 포위전에서도 독일군은 초기에 설정한 다수의 전략 목표 대신 가용한 모든 사단을 투입해서 102공수사단이 방어하는 7개 도로가 지나간다는 교통 요충지 바스토뉴를 공략했어야 했다. 미군은 102공수사단이 성공적인 방어전을 치르면서 시간을 벌게 되었고, 남쪽에서 쉴 새 없이 진격해온 패튼의 3군이 마침내 바스토뉴 방어군과 합류하면서 절체절명의 위기는 모면하게 됐다.

 

<아르덴 대공세 1944>에서 앤터니 비버는 브래들리가 여전히 치열한 전투가 치러지는 와중에서도 최전선의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냉정하게 비판한다. 거만한 몽고메리는 오직 서부유럽 지상군의 총사령관이 되겠다는 욕심으로 가득 차서 언론을 동원한 언론플레이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아이젠하워는 절묘하면서도 때로는 냉철한 판단력을 동원해서 타개해야 했다. 적은 전방 뿐 아니라 후방에도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나마 몽고메리가 82공수사단이 방어하던 광대한 지역을 후퇴해서 좁힌 결정은 탁월했던 것 같다. 몽고메리가 가끔은 그렇게 기특한 짓도 하는구나 싶었다. 저자는 책의 어디선가 자신의 병력이 상대를 압도할 때까지 신중하게 기다리는 게 몽고메리의 종특 중의 하나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엘 알라메인에서 롬멜을 격파한 것도 그런 자기 신념의 발현이 아니었나 싶다.

 

아르덴 숲을 뒤덮었던 악천후가 물러가고, 화창한 날씨가 시작되자 연합군 전투폭격기들이 출동해서 독일 전차부대와 후방을 맹폭격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미 이 때, 독일군은 뫼즈강 진격을 포기하고 후퇴했어야 하는데 히틀러의 거부로 후퇴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심지어 퇴각하기 위한 연료가 부족해서 차량과 장비들을 다 파괴해야 할 정도였다니 말다했다.

 

방한복과 동계 식사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경험한 독일군이 미군에 상대적으로 나은 상태였지만, 전체적인 보급에서 독일군은 미군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혹심한 추위도 문제였지만, 전투에 가장 필요한 연료와 탄약 부족 때문에 결국 독일군은 미군에게 패했다. 초기 독일군의 맹진격을 막아낸 것도 미군의 압도적 포병 전력 덕분이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도 독일의 생산력은 연합국 특히 미국의 그것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아마 아르덴 전역에서 독일군은 미군에게 연료와 탄약 부족 때문에 패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외에도 전장의 병사들을 괴롭힌 질병은 참호족과 동상 그리고 이질이었다. 이제 막 전장에 배치된 신병들이 경험하게 된 전투피로증 역시 심각한 문제였다.

 

전쟁광 패튼은 이 시국에 적의 본진에 대한 반격을 시도해서 일거에 제3제국을 무너뜨리자는 획기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다. 사실 그 부분은 히틀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독일군에게 회심의 일격을 당한 연합군에게 그럴 만한 여력은 없었다. 아르덴 대공세가 히틀러의 마지막 도박이었다면, 패튼의 제안 역시 거대한 판돈을 굴리는 도박이 아니었을까 싶다. 너튜브를 통해 알게 된 메츠 부근에서 벌어진 포르드리앙 요새 전투의 경험을 패튼은 망각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동안은 독일이 점령한 타국에서의 전투였지만, 라인강을 돌파한 뒤에는 독일 본토 사수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전투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물론 동쪽에서 소련이 파시스트의 소굴로 향하는 마지막 대공세를 시작하면서 제3제국의 힘을 온통 빼놓으면서 서부 전선도 저절로 무너지는 효과를 가져 왔다는 건, 부수적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다.

 

지난 열흘 동안 앤터니 비버의 <아르덴 대공세 1944>를 읽으면서 그동안 여러 가지 통로를 접해온 벌지전투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다. 이미 그전에도 플래닛미디어에서 나온 두 권짜리 <벌지전투>를 만나 보았는데, 이번에 앤터니 비버 저자의 저작은 그야말로 아르덴 전투를 집대성한 그런 걸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곳곳에서 보이는 인명에 대한 통일되지 않는 표기와 전투에 참가했던 실존 인물의 상이한 계급 정도는 애교로 봐주자. 앤터니 비버의 또 다른 기대작 <아른험>을 기대하며, 부족한 리뷰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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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5-05 10: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바로 검색했는데 <스탈린 그라드>는 품절이네요! 관련 책 읽다보면 다큐도 미드도 영화도 달리 보이더라구요. 아직 모르는 게 엄청 많지만요.ㅋㅋ

레삭매냐 2021-05-05 12:07   좋아요 2 | URL
밀리터리 관련 서적들은 단가가
있어서 그런지 초도 물량이 빠지면
더 찍지 않는 것 같습니다.

<스탈린그라드>,
기록을 찾아 보니 저는 9년 전에
같은 책을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제목으로 만났
네요. 이게 아마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문구라고 하던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