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실레스트 잉 지음, 이미영 옮김 / 나무의철학 / 2018년 5월
평점 :
품절



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타임>이 선정한 지난 십년의 소설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읽기 시작했는데, 왜 이렇게 익숙한 거지. 이거 내가 처음 읽는 게 아닌가봐. 알고 보니 지난 2월에 도서관에서 빌린 기록이 있더라. 아마 어느 정도 읽다가 다 읽지 못하고 반납한 모양이다. 결국 중고서점에서 사다가 다시 읽었다. 결과는 대만족이다.

 

미국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인근의 부자들이 사는 동네 셰이커하이츠가 공간적 배경이다. 그리고 시간적 배경은 빌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재직 중이던 1997년과 1998년 즈음이다. 그게 벌써 20년 전의 일이구나. 워터게이트로 깨끗한 정치지도자라는 미국 대통령의 위상이 만천하에 공개됐다면, 클린턴 스캔들은 대통령 역시 보통의 인간들과 같은 욕망의 존재라는 걸 드러냈다고나 할까. 실레스트 잉은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추잡한 스캔들을 다이너마이트 오럴 섹스라는 도발적인 문구로 저격한다.

 

완벽해 보이는 리처드슨 네 집에 불이 나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누가 이 멋진 집에 불을 지른 걸까? 이 사소해 보이는 불씨는 모두가 가지고 있었을 뿐, 언제고 도화선이 당겨지면 불타오를 수 있다는 방증이다. 완벽한 보이는 중산층 가정인 리처드슨 네 집에 이질적인 이방인 미아 워런과 펄이 침투하면서 위선과 가식으로 포장한 그네들의 삶이 속속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미아와 펄 모녀는 자그마치 46곳이나 되는 미국의 곳곳을 누빈 그야말로 방랑자의 전형이다. 그들은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비싼 물건을 소유할 수도 없었고, 이동을 위해 최소한의 것들만 폭스바겐 래빗에 실어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진 예술가 미아는 주거지와 먹을 것을 장만하기 위한 비용을 벌기 위해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했고, 딸 펄은 중고 상점에서 구제 옷을 구해 빈티지 마냥 입고 다닌다. 리처드슨 가정이 미국의 빛을 상징한다면, 워런 네는 그림자 정도라고 보면 될까.

 

자 그런데 빛과 그림자가 만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 걸까. 바로 이 지점을 실레스트 잉은 정확하게 타격한다. 리처드슨 가정의 아이들은 렉시, 트립, 무디 그리고 방화범이자 말썽꾸러기 이지로 구성되어 있다. 펄에게 관심을 갖은 무디의 초대로 펄은 완벽한 가정에 이방인으로 참여하게 된다. 지역신문 기자로 활동하는 박애주의자 엘리나 리처드슨 여사는 미아에게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세를 놓는다. 그들을 돕고 싶었던 엘리나는 미아에게 자신의 집에 와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면, 세를 면해 주겠다는 관대한 제안까지 하기에 이른다. 미아는 이 제안이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직감한다.

 

이렇게 정교하게 설계된 리처드슨 가정과 워런 가정의 관계는 미아의 친구 베베 초우의 아기 미라벨 아니 메이링의 입양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3학년 렉시는 미아의 도움으로 예일대 합격증을 받게 되지만, 남자친구 브라이언과의 불장난으로 낙태 수술을 받게 된다. 펄은 친구 무디의 형 트립과 첫경험을 하게 되고,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는 무디는 펄과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다. 사진 예술가 미아가 가진 매력에 빠진 말썽꾼 이지는 미아의 조수를 자처해서 사진 기술을 배운다.

 

한편, 빌리 리처드슨은 너무 형편이 어려운 나머지 미라벨을 유기한 베베 초우에 맞서 소송대리에 나선다. 베베 초우 사건은 가정마저도 두 편으로 가를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지역공동체의 핫이슈였다. 어쩌면 대통령 탄핵의 버금갈 정도의. 미아가 베베의 조력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엘리나는 미아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왜 실레스트 잉이 엘리나의 직업을 기자로 설정했는지 알 수 있었다.

 

미국의 양심을 대변하는 68세대였던 엘리나는 기득권층에 편입되어 자신이 보고 싶은 진실만을 추구한다. 젊은 날의 이상은 휘발되어 버리고, 부모 기성세대의 허위와 위선을 공격하던 베이비부머들은 그들의 부모세대가 보여준 것 이상의 위선을 삶 가운데서 시전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미아의 과거를 추적하던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진실들은 부메랑처럼 날아와 리처드슨 가정을 강타한다. 문학에서 작가가 곳곳에 설치한 오해라는 장치야말로 진실을 극대화하는 그런 요소가 아닐까. 결국 엘리나의 선택은 현실안주와 이지 같은 껄끄러운 존재의 배제였다. 엘리나에게 교정은 처음부터 선택지가 아니었으니까,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었다.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는 부의 불평등으로 점점 더 계급사회가 되고 있는 21세기 현실에 대한 정밀 보고서다. 20년 전, 케네스 스타 공식 리포트로 미국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시대상을 바탕으로, 절묘하게 구성된 실레스트 잉의 서사는 이 소설이 왜 지난 십년을 대표하는 소설로 꼽히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다양한 캐릭터의 향연, 절묘한 서사 그리고 시대상까지 반영한 다음, 화끈한 한 방의 불꽃놀이로 대단원을 장식하는 결말까지 거의 완벽한 소설이 아닌가 싶다. 저물어 가는 기해년 말미에 <먼 북>에 이어 이런 수작을 만나게 되어 즐거웠다. 새벽까지 책을 읽느라 몸은 좀 피곤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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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11-30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말 아침부터 우와~👍👍👍

레삭매냐 2019-11-30 14:49   좋아요 1 | URL
다 읽고 나서 기억이 생생할 때
리뷰를 날리는 게 나중에 쓰는
것보다 낫더라구요.

다 이자뿌기 전에 언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