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파도
소날리 데라냐갈라 지음, 김소연 옮김 / 나무의철학 / 2013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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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어떻게 알게 되었더라. 이번에 <타임>에서 발표한 지난 십년 동안 논픽션 베스트 10의 한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한 작품이다. 원제는 <Wave>. 때마침 지난 9월초에 사둔 책이라 바로 읽을 수가 있었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5년 전에 읽을 수도 있었더라.

 

그야말로 꿈같이 행복한 일상을 살던 소날리 데라냐갈라의 삶에 비극이 시작된 건 20041226일 아침이었다. 이른바 박싱데이에 스리랑카 남동부의 얄라 국립공원을 덮친 지진해일은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 경제학 박사 소날리의 그야말로 꿈결 같은 삶을 송두리째 파괴해 버렸다. 다시 한 번 가공할 만한 자연의 위력 앞에 선 인간의 부질없는 모습에 그만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발생한 지진해일이 소날리의 사랑하는 남편 스티브 리센버그와 맏아들 비크람 그리고 둘째 아들 말리를 모두 앗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마저도.

 

지진해일이 그들이 묵던 호텔을 덮었을 때, 소날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안위를 걱정할 틈이 없었다. 예상했던 그대로, 나중에 수습이 되고 시간이 지난 뒤 소날리는 자신이 어쩌면 그럴 결정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자책하게 된다. 자신도 사랑하던 가족과 함께 죽었어야 했노라고 담담하게 적는다. 파도에 휩쓸려 가기 직전에 나뭇가지를 잡는데 성공해서 생존했지만, 삶은 그녀에게 지옥이었다.

 

아수라장이 된 병원으로 후송된 소날리는 엄청난 재해 앞에서 가족들이 무사할 거라는 기대를 접는다. 수도 콜롬보에 있는 이모의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자기부정 그리고 현실도피를 하기 시작한다. 당시 그녀의 일상 중의 하나는 인터넷으로 자살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가족을 모두 잃은 마당에 그녀에게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주변의 걱정과 우려도 그녀는 원하지 않았다. 결국은 시간이 약이라는 말일까. 그녀가 극단적 선택을 할까봐 친척들과 친구들은 교대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담담한 어조의 글을 읽는 게 너무 힘들 지경이었다.

 

논픽션 <천 개의 파도>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부모님에 대한 소날리 데라냐갈라의 애가다. 그녀의 비극적인 상황에 나를 대입해 보는 그런 어리석은 설정은 하지 않으리라.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단장이 끊어지는 그런 고통을 내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아이들의 추억이 묻은 모든 곳들이, 물건들이 그리고 추억들이 소날리에게는 고통의 근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날리는 점차 생활반경을 넓히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끝내 외면했던 얄라도 방문하고, 더 나아가 그들의 생활 근거지였던 런던 집도 방문한다. 그 모든 과정들이 고통의 연속이었다. 비크와 말리의 이웃 친구들을 볼 때마다, 소날리의 가슴은 그야말로 찢어졌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 있다면 저 나이였을 텐데 하는 후회가 찾아 들지 않는 순간들이 없었다. 하늘을 나는 새를 유난히 좋아했던 비크를 추억하게 해주는 갖가지 새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스리랑카에 가보지 않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아름다운 풍경들과 황금항문나이팅게일이며 흰배참수리 같은 동물들에 대한 묘사를 보면서 소날리 데라냐갈라가 경제학 박사가 아니라 소설가라고 해도 믿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후반에는 런던과 스리랑카를 오가며 살았던 젊은 날의 추억들을 회상하기도 한다. 일견 무모해 보이는 스티브의 청년 시절에 대한 이야기, 낯선 영국 땅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손녀딸에게 색소 결핍증에 걸린 원숭이를 만나지 말라는 당부에서는 어찌나 웃음이 나던지. 동부 런던의 중산층 출신 스티브는 돌아가신 장모님이 만들어 주신 새우 카레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 어떤 기억들은 실제의 그것보다도 훨씬 더 오래 가는 법이지. 이런 추억들을 뒤로 하고 정상적인 삶으로 복귀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천 개의 파도>를 보다 값지게 만드는 것은 소날리의 진정성이다. 절망감에 휩싸여 혼자 싶어 하는 감정이나, 처음 만난 이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상황을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장면들이 그렇다. 아마 사실 대로 말했다가는 상대방이 감당해야 할 동정 그리고 연민들까지도 보듬어야 할지 몰랐으니까. 모두에게는 스스로 감정을 추스를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현실과 자신을 부정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그런 감정까지도 소날리는 그대로 책에 담아냈다. 무엇 때문에 <천 개의 파도>가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가 있었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과거에 대한 다양한 변주들로 이루어진 책, <천 개의 파도>는 나에게 올해의 발견으로 꼽을만한 그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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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건축가 2019-11-22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보니 읽고 싶어지네요. ^^

레삭매냐 2019-11-29 14:05   좋아요 0 | URL
요즘 타임에서 선정한 지난 십년의 소설
과 논픽션을 골라 읽고 있는데 역시나
명불허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