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1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조민현 옮김 / 민음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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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 작가의 신간 소설을 통해 스페인 출신 지성인 작가라는 타이틀의 미겔 데 우나무노를 알게 됐다. 바로 중고서점에 달려가 그의 책을 샀다. 1914년에 발표된 그의 대표작 <안개>. 아 왜 진작 나는 이런 작가를 알지 못했을까. 그리스어 교수, 소설가, 시인 그리고 철학자가 쓴 소설이라고 해서 조금 겁을 집어 먹었다. 책을 펴보니 전혀 그런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지극히 대중적이 소설이었다. 게다가 막장적인 요소까지 겸비하고 있어서 내 입맛에 딱 들어맞는 그런 작품이라고나 할까. 참고로 그의 다른 작품들인 <모범소설><사랑과 교육>도 사들였다. 일단 어느 작가에 빠지게 되면 컬렉션부터 하는 나의 습성이 발동된 것이다.

 

왠지 모르게 에라스무스를 연상시키는 이름의 우나무노 작가는 처음부터 주인공 아우구스토 페레스의 비극적 죽음에 대해 선빵을 날린다. 그렇다, 주인공은 죽었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왜 죽었을까? 부유한 집안의 상속자에 법대 출신의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남자 아우구스토는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피아노 선생 에우헤니아 도밍고 데 아르코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렇기 그렇게 가는 거지.

 

문제는 에우헤니아에게는 사랑하는 남자친구 마우리시오란 놈팽이가 있다는 것이다. 고아 처녀 에우헤니아를 데리고 있는 그녀의 고모는 당연히 예의 놈팽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무정부주의자인 고모부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에우헤니아의 당연한 선택은 바로 아우구스토다. 정해진 정답이 있는데, 왜 굳이 인생의 가시밭을 가려는 것인가. 칡과 등나무가 얽힌 갈등구조의 기원은 바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에우헤니아의 선택에 있다.

 

설상가상으로 에우헤니아의 집은 부채 때문에 저당이 잡혀 빚쟁이들에게 넘어갈 판이다. 짜잔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부잣집 도련님 아우구스토가 사랑하는 에우헤니아의 빚을 다 갚아준다. 1910년 전투적 페미니스트 같은 에우헤니아는 나쁜 남자의 매력이 듬뿍 빠져 자신에게 행복을 보장해 줄 것처럼 보이는 남자 아우구스토 대신 상건달 마우리시오를 선택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후견인들이 자신을 아우구스토에게 팔아먹으려 한다며 폭언도 마다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그게 사실이기 때문에 고모나 고모부 역시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그 와중에 등장하는 세탁소 19세 처녀 로사리오에 대한 아우구스토의 불같은 연정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꿩 대신 닭이라고 했던가. 자신이 손에 넣을 수 없는, 무슨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정복할 수 없는 에우헤니아 대신 순박한 로사리오에게 눈을 돌린 아우구스토의 행위는 참 비겁해 보인다. 심지어 짝을 맞추기 위해 충직한 하인의 아내에까지 흑심을 품는 아우구스토. 너란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 아우구스토는 에우헤니아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게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던 것 같다. 그런 감정을 부풀려서 고통의 불구덩이 속으로 따려드는 주인공의 모습은 참 애처롭다. 결국 아우구스토는 마녀 같은 에우헤니아와 그녀의 놈팽이 마우리시오가 준비한 덫에 걸려 세간의 조롱거리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이렇게 끝이냐고? 절대 아니다. 이미 카지노에서 절친 빅토르와의 대화를 통해 벨에포크 시대 끝판에 등장하는 숱한 스페인식 막장 드라마의 전형들이 무대에 올랐다가 내려가길 반복한다. 그리고 놀라운 지성의 소유자라는 우나무노가 전개하는 스타일에 그만 반해 버렸다. 주로 대화를 통해 구사되는 서사의 속도감 넘치는 진행은 일품이다. 이게 진정 철학자 출신 소설가의 작법이란 말인가하고 자신에게 되물을 정도의 재미가 넘쳐흐른다.

 

제목으로 저자가 점지한 <안개>는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불확실한 미래를 상징하는 것으로도, 도대체 그 속을 알 수 없는 남녀관계의 오묘함에 대한 미스터리로도, 궁극적으로 작가가 창조한 황망한 허구와 지독한 현실을 오가는 서사의 고갱이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비록 한 권 밖에 읽지 못했지만(우나무노가 두 번째로 발표한 <모범소설>을 바로 뒤이어 읽기 시작했다) 이런 작가야말로 나의 문학 세계의 전당에 오를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자 소설가는 고상한 철학적 용어나 개념으로 독자의 두개골에 심한 압박을 주는 대신,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 아니 일견 통속적으로 보이는 삶을 관통하는 본질에 천착하는 깨달음이 바로 저기에 있지 않느냐고 지그시 알려준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이러니 내가 어찌 우나무노의 작품을 애정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올해의 발견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정도의 그런 작품이자 작가다.


[뱀다리] 마구 흥분해서 지껄이다 보니, 진짜는 쓰지 않았다.

그러니 직접 읽어 보시라. 놀랄 만큼 뻔뻔한 작가의 노골적

개입에 두 손 두 발 모두 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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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11-15 19: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함 읽어보고싶네요 레삭매냐님 두 손 두 발 다 든 이 작품 ㅋㅋㅋ

레삭매냐 2019-11-19 11:02   좋아요 2 | URL
두번째로 읽은 <모범소설>도 정말
에스파냐식 막장 소설이더라구요...

대중소설의 재미에 흠뻑 빠지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