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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평점 :
존 맥스웰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이달의 달궁 독서모임 책으로 선정되어서 읽게 되었다. 사실 책의 분량으로 보면 금세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근 한 달이 걸려서 읽었다. 이번에 읽으면서 기존의 다른 리뷰들을 읽고 자료도 취합하고 그러다 보니 쿳시의 큰그림을 볼 수가 있었다, 역시 이래서 고전급 소설들은 재독해야 하는가 보다.
올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영화화된 <야만인을 기다리며>가 상영되어 관심을 끈 모양이다. 정보부 소속 냉혈한 졸 대령 역을 자니 뎁이 맡아 화제를 모았다.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제국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어느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시절도, 특정한 지역임을 알 수 있는 정보는 전무하다. 그저 제국의 영토라는 점만을 알 수 있다. 소설의 화자는 변제국의 변경에서 지난 30년 동안 행정권을 행사해온 치안판사다. 이제 곧 은퇴를 앞둔 치안판사는 그저 아무 일 없이, 자신의 일상을 영유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개인의 의지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반해서 진행되기 마련이다. 정보부 소속 졸 대령은 북쪽 지방의 야만인들이 준동한다는 첩보를 바탕으로 “야만인”들을 체포해서 고문하고 죽이기까지 한다. 졸 대령과 치안판사로 대변되는 문명 제국의 하수인들은 그렇게 제국의 영속을 위해 부역하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제국은 영속하기 위해 상시적 불안이 필요했고, 변경의 야만인들이야말로 불안 조성에 안성맞춤이었다. 아마 야만인들이 조직화된 문명 제국의 일원이었다면, 제국은 쉽게 원정대를 파견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을 것이다. 제국 군인들은 야만인들을 우습게 여겼고, 그들을 쉽게 제압할 거라고 생각하고 원정에 나섰다.
제국 통치의 일원이었지만, 행동하는 양심적 인사로 거듭나는 치안판사는 졸 대령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의 부인은 위선에 지나지 않았다. 제국 변경의 통치라는 제국의 영속을 위한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일개 치안판사의 저항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게다가 그는 주변에 너무 많은 허점을 지니고 있었다. 군인들의 고문으로 시력을 잃은 야만인 소녀를 고향에 데려다 주고 돌아온 치안판사는 ‘반역적 내통’이라는 어마무시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것은 어쩌면 탈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창하는 쿳시다운 설정이 아닐 수 없다. 폭력적 식민지배에 부역한 인사의 추락이 주는 전복적 쾌락 말이다. 치안판사는 야만인들이 자신들의 원래 생활방식 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변경 요새의 안락함을 깨닫게 된 야만인들은 그것을 거부한다. 한편 치안판사는 변경에서의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야만인들이 자신들을 공격할 이유가 없다고, 군인들을 설득하지만 야만인들의 존재를 제국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규정한 그들에게 치안판사의 논리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
치안판사의 야만인 여자들에 대한 탐닉도 주목할 점이다. 제국에 부역하는 대가로 치안판사는 변경 지역에서 권위를 다지는 동시에, 성적 욕망의 해소에도 적극적이었다. 졸 대령이 떠난 변경의 책임자가 된 만델에게 치안판사가 탄핵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런 문란한 사생활이었다. 치안판사의 입장에서 야만인들과의 반역적 내통 혐의는 말도 되지 않았지만, 정황을 놓고 본다면 치안판사가 목숨을 걸고 사막지대를 통과해서 야만인 출신 장님 소녀를 고향에 돌려보낸 이유가 내통이라는 게 훨씬 논리적이지 않았을까.
졸 대령의 야만인 섬멸 원정대는 변경 오지의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면서 결국 자멸한다. 그들의 원정은 치안판사의 예언대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적이 없는데 누구와 싸운단 말인가. 군인들이 만들어낸 유언비어에 변경의 주민들은 오랫동안 살아온 삶의 터전을 떠나 수도로 향한다. 비상 계엄령 하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군인들은 야만인들보다 더 무섭게 주민들의 재산을 약탈한다. 포로로 잡힌 야만인들의 볼과 손을 철사로 꿴 군인들이 더 야만적이지 않은가. 제국에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않는 이들을 잡아 고문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하는 제국의 하수인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야만인들이 아니었을까.
변경의 최고위 행정을 담당하던 치안판사는 하루아침에 죄수 신세가 되어 감옥에 투옥된다. 그가 꿈꾸던 소소한 일상은 더 이상 기대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한 때 당당했던 변경의 행정 책임자가 어느새 하루의 끼니와 악취는 풍기는 그런 거지같은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조용하게 인생의 마지막 장을 준비하던 치안판사는 이런 생존의 위기를 겪으면서 각성한 인격체로 거듭난다. 개인의 고난은 모름지기 기존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그것을 이식하기 위한 하나가 기회로 규정된다. 그는 포로로 잡힌 야만인들을 야만적인 방식으로 처형하려는 졸 대령의 처분에 격렬하게 저항을 시도한다. 물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팔이 부러질 정도로 얻어맞지만, 쿳시는 이 지점에서 탈식민주의 시대를 사는 지식인의 굳건한 초상을 그려낸다. 한 때, 식민주의/제국주의에 봉사했지만 시절이 바뀌었으니 보편 인류의 평등한 삶을 옹호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을까.
존 맥스웰 쿳시가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그리는 다양한 주제들은 우리가 사는 지구별의 어디에 적용시켜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당장 가짜 뉴스가 증오와 분노를 유발시켜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는 우리의 그것과 절묘한 공명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소설에 등장하는 제국의 옹호자들은 기존 질서의 기득권층으로 대치된다. 야만인이라는 이름의 타자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내가 어떤 이유에서 타자화의 대상인 ‘야만인’이 된다면 어떨까. 아니 내가 다른 야만인들을 공격한 건 아닌가? 객관적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쿳시는 내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