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훙장 평전 - 중국 근대 대사상가 량치차오, 동시대 실권자 리훙장을 말하다
량치차오 지음, 박희성.문세나 옮김 / 프리스마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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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중국 3대 인물 평전이라는 글을 보고서 이 책을 구했다. 그리고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날 때까지 묵혀 두었다가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분량의 책이 아니라 금세 읽을 수가 있었다.

 

오래 전 대학 강의 시간에 들었던 인물들이 등장하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더라. 그 때는 중국식 이름이 아닌 강유위, 담사동이라고 불렀었는데 이제는 캉유웨이, 탄스퉁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이름을 보자니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19세기 말, 중국은 그야말로 서세동점의 시기였다. 부패한 만주족의 나라 청나라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었다. 영국과 벌인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의 실력을 파악한 서구 세력들이 마구잡이로 청나라의 주권을 침해하고, 이권쟁탈에 눈이 멀어 있었다. 이러한 사정이 외우라면, 내환은 내부의 반란이었다. 홍슈취안의 태평천국의 난을 그야말로 나라의 뿌리를 뒤흔들었다. 연이은 염군의 반란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 홀연히 등장한 인물이 바로 리훙장이었다. 난세는 영웅을 부른다고 했던가. 과거에 합격한 진사 출신으로 한림이었던 리훙장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만주족 정권의 한인 관료였던 쩡궈판 휘하에서 태평천국의 난 평정에 투입되어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정적이었던 저자 량치차오는 리훙장에 대해 공정한 기술을 하겠다고 서두부터 공언한다. 어떤 이들은 리훙장이 송대 진회 같은 매국노, 간신 부류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태평천국의 난 가운데 장쑤성 남부를 평정하고 10년 동안 관군의 골칫거리였던 염군을 태평천국의 난을 통해 배운 전법으로 단 1년 만에 진압한 점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고 못 박는다.

 

사실 태평천국의 난에 대한 저자의 기술은 뛰어나지만, 아무래도 중국 지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관군의 진격이나 태평군의 반격 등에 대해 전체적인 조망을 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어리석은 독자의 무지 탓이다. 어쨌든 리훙장은 상하이까지 육박한 태평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전세를 뒤집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태평군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라는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라이벌의 공을 마지막 순간에 등장해서 채갈 것이라는 오명을 두려워해서인지 어쩐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찰스 조지 고든으로 대표되는 외국인 용병으로 구성된 상승군의 활약도 태평군을 진압하는데 한몫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사실 서구 열강은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했을 때 관망하는 태도였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태평군을 지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고든의 전임자는 심지어 태평군에 투항하기도 했다고 하지 않던가. 고든이 태평군의 투항을 보증했지만, 반복되는 배신에 질린 리훙장은 투항한 태평군 장수들을 계략으로 모두 몰살시키기도 했다. 이에 화가 난 고든이 총으로 리훙장을 죽이겠다고 나선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별 일이 다 있었군 그래. 태평군의 마지막 지도자 리슈청에 대한 에피소드도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라 그런 진 몰라도 흥미진진했다. 조너선 스펜스 교수가 저술한 <신의 아들 홍수전과 태평천국>에 다시 도전해 봐야 하나 싶다.

 

그 다음 역사의 장면은 리훙장의 양무운동이다. 산업혁명을 거쳐 서구 열강의 선진 문물을 접한 리훙장은 양무 그러니까 서구의 신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운동을 전개한다. 문제는 리훙장의 양무운동은 어디까지나 군사 기술 혹은 무기 도입에 관한 부분이었고,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추동되지 않은 처음부터 한계를 지닌 운동이었다고 량치차오는 냉정하게 비판한다. 그 결과, 청일전쟁에서 한수 아래로 평가받던 신생 일본에게 치명적 타격을 입고 종이호랑이 신세가 되어, 서구 열강의 이권 침탈이 가속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청일전쟁은 리훙장이 막대한 비용과 20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육성한 북양해군과 자신의 회군은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성환전투, 황해해전 그리고 평양전투에서 하나의 통일된 지휘권에 통합되지 않은 청군은 일본군에게 연전연패할 수밖에 없었다. 군의 사기는 물론이고, 무능력한 지휘관들은 적전에서 도주를 일삼았고, 패전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리훙장은 얼굴에 총을 맞아 가면서까지 이토 히로부미와의 치욕스러운 텐진조약 및 마관조약으로 강화를 맺는다. 전쟁배상금과 조선에서의 종주권 상실, 타이완과 랴오둥 반도 할양으로 일본은 제국으로 가는 문을 활짝 열어 제친다.

 

태평천국과 염군의 반란을 제압한 리훙장의 초반 운은 영웅의 기개에 걸맞은 성공의 연속이었다. 자신의 실력도 있었겠지만, 운도 상당히 작용했다. 반면, 서구 열강의 중국 침탈이 가속되어 가던 중에 실시된 양무운동과 청일전쟁은 노회한 외교관에게 치명적인 실패였다. 량치차오는 계속해서 모든 책임을 리훙장에게 미룰 수 있는지에 물음표를 던진다. 서태후의 독재 아래 망조가 들린 청조정은 이미 대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리훙장 말고 다른 누가 이미 망해가는 청조를 떠받들 수 있었단 말인가.

 

양광총독이라는 한직에 물러나 있던 리훙장은 20세기초 중국을 뒤흔든 의화단의 난으로 발발된 서구 열강의 개입을 무마하는 신축조약을 마지막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량치차오는 자신과는 정치적으로 상극의 자리에 있었던 라이벌 리훙장에 대한 평전을 공정하게 기록했다. 과는 과대로 그리고 공은 공대로 나름의 편견을 가지지 않고 평가하려고 노력한 점이 돋보였다. 모름지기 학자이지 지식인이라면 이런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도광양회(韜光養晦)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했던 치욕의 시대를 뒤로 하고, G2 국가가 되어 팍스 아메리카나에 도전장을 내민 중국의 오늘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하나의 전범으로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평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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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8-14 2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편전쟁 당시 린쩌쉬(임칙서)와 태평천국운동 당시 리훙장이 청조 말을 지탱하던 촉한의 강유와 같은 존재로 여겨집니다. 중국 왕조가 멸망할 때마다 백이숙제 이래로 적어도 한 명씩은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한다고 했을 때, 리훙장을 그 한 명으로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레삭매냐 2019-08-16 13:43   좋아요 1 | URL
재밌는 장면 중의 하나가 중국사에 등장하는
상중하책을 외국인인지 누군가가 리훙장에게
헌책했다는 겁니다.

당장 독립해서 중국 남부에 신국가를 건설하
는게 상책 뭐 그런 아이디어였는데 항상 그렇
지만 결정권자는 하책만을 고르지요.

결국 중국이 서세동점의 시기에 열강의 먹잇
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그런 썰이 흥미롭
더군요.

겨호님이 지적하신 부분이 아주 정확해 보입
니다. 지난 왕조에 대한 충성 뭐 그 정도로
보면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