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와 르네상스 - 피렌체에서 집시로 살아가기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집시와 르네상스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라는 호기심에 타부키의 책을 두 번째로 만나게 됐다. 이탈리아 출신 작가 안토니오 타부키의 <집시와 르네상스>의 시공간적 배경은 지난 세기말의 피렌체다. 구유고슬라비아가 내전으로 초토화되면서 발칸반도 그 중에서도 세르비아와 코소보 그리고 마케도니아에 살던 집시들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지금 시리아 내전과 리비아 내전이 수많은 난민들을 만들어냈다면 20년 전에는 유고내전이 그랬다.

 

집시에게 덧입혀진 도둑, 불결함 그리고 구걸 같은 부정적 이미지는 어디에서 왔을까? 인도 북부에서 유래했다는 유랑민족에 대한 정주민들의 네거티브 프로파간다가 아닐까 싶다. 집시들은 피렌체 외곽에 설치된 올마텔로, 포데라초 같은 낯선 이름의 수용소에 갇혔다. 이탈리아 시민들도 아닌 이방인들에게 위생시설이나 제대로 된 거주시설 같은 것들이 주어질 리가 없었다. 코무네와 소수의 양심적인 인사들이 제공하는 물자는 집시들에게 턱없이 부족했다. 이것이 인간인가, 나는 왜 또다른 이탈리아의 양심이 외친 말이 떠오르는가.

 

그런데 저자가 명백하게 통속적인 도시라고 밝히는 위대한 인문학의 도시 피렌체가 지닌 제노포비아의 역사는 유구했다. 이미 메디치 일 마니피코가 다스리던 공국 시절부터(무려 500년 전부터!) 집시들은 추방과 배제의 대상이었다고 타부키는 역사적 고찰을 통해 밝힌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일자리와 마실 물 그리고 음식도 없는 비참한 집시들의 스케치가 연간 수백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꽃의 도시 피렌체의 단면이라면 또 한편에서는 피렌체 비엔날레라는 이름의 흥청망청한 파티가 진행되고 있다. 타부키가 노린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도시의 한 편에서는 인간들이 인간 이하의 삶을 영속해 가는데 또 한 편에서는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얼치기 행사에 수십억 리라를 쓴다는 역설적 상황 말이다.

 

수십개의 분절로 이루어진 글을 읽으면서 가장 슬펐던 장면 중의 하나는 누군가 집시 소녀에게 소녀가 한 번도 가지지 못한 인형을 선물했는데 그 선물이 집시 소녀의 품에서 폭발했다는 지점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인 인간인가. 집시 청년과 이탈리아 아가씨와의 사랑은 온갖 역경을 이겨낼 것 같았지만 결국 오래된 프로파간다의 위력으로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는 전언도 비극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자본과 패션의 르네상스를 원하는 이들에게 안토니오 타부키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사제 폭발물을 투척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시들을 환대한다는 이미지를 보여 주기 위해 집시 노인들에게 아파트 열쇠를 건네주는 코무네가 기획한 쑈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누군가는 꽃의 도시 피렌체에서 압도적인 예술품들을 보면서 스탕달 신드롬을 경험할 것이다. 하지만 또 누군가는 올마텔로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초현실적인 모습을 보고 비슷한 수준의 분열증을 겪을 지도 모르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9-07-15 1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려한 축제 분위기와 그 분위기에 가려져 배제된 집시들의 삶이 공존하는 피렌체. 88 올림픽이 열리기 전의 서울의 분위기와 비슷하네요. 정부가 서울역 주변에 있는 노숙자들을 쫓아냈고, 서울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잘 보이려고 낡고 오래된 건물들을 철거한다는 이유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쫓아냈잖아요.

레삭매냐 2019-07-15 17:04   좋아요 0 | URL
싸이러스 브로의 지적이 정확하게 맞습니다 !

가장 자유주의적이고 유구한 인문학의 역사
를 자랑하는 도시에서 그런 야만적인 행위
들이 수백년 동안 자행되어 왔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다시 한 번 이것이 인간인가를 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