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물고기 묘보설림 4
왕웨이롄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링허우 세대의 작가 왕웨이롄 작가의 <책물고기>에 첫 번째로 등장한 단편을 읽는 도중에 소금호수에서 죽은 자오형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중에 우유니 소금사막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나의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무언가를 읽거나 보면 연상되는 건 국경을 초월한 그 무엇이 아닐까 싶었다.

 

표제작 <책물고기>[書魚]에서는 그놈의 휴대폰 때문에 점점 더 책을 멀리 하게 되고 있는 현 세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현대소설의 시작이라는 카프카의 <변신>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고, <변신>의 변용이라고 할 수 있는 책물고기, 다른 말로는 책벌레 혹은 응성충이라는 내가 전에 접해 보지 못했던 낱말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하기도 했다.

 

지난여름 폭염 속에 비가 내렸을 때, 책등이 운 것을 보고 속상해 했던가. 그렇다고 해서 그 많은 책들을 하나하나 꺼내서 거풍을 시킬 자신은 도저히 없었다. 그냥 그런 감성을 희귀한 증상이자 벌레인 응성충을 만난 작중 나레이터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하는 단상이 잠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소설집 <책물고기>에서 나를 강력하게 사로 잡은 이야기들은 3번의 <아버지의 복수>와 4번의 <걸림돌>이다. <아버지의 복수>는 낙하산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주인공 유웨이의 아버지의 내력에 관한 이야기다. 북방 출신으로 광저우 토박이가 되길 원하는 화자의 아버지는 조국에서 만든 페이타 샴푸를 광저우 웨슈구를 누비며 가족을 부양했다. 광저우 사람들은 아버지처럼 북방에서 온 사람들을 “베이라오”라는 경멸적인 말로 불렀다. 갖은 노력을 해도 세일즈맨인 아버지는 광저우 토박이들의 어휘와 사투리를 익힐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것 역시 위기에 처한 인물의 정체성 위기에 관한 이야기일까. 가족을 위해, 세상에서 고군분투하는 아버지들의 신산한 삶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읽을 수가 있었다.

 

결국 자신보다 더 싼 몸값의 베이라오들에게 자리에서 밀려난 아버지는 택시 운전사로 전업을 하면서 비로소 광저우 사람보다 더 광저우 사람같은 사람이 되었다. 그것은 세일즈맨이라는 직업이 자신의 말만 하는 직업이었기 때문이라는 화자의 냉철한 분석이다. 택시운전을 하면서 만나게 된 고객들과 쌍방 소통에 나서게 되면서 아버지는 비로소 광저우 사람이 된 것이다! 유웨이는 아버지가 집착하는 그런 광저우가 싫어서 부러 멀리 베이징으로 대학진학을 하고, 직장도 베이징에서 얻게 된다. 휴가를 얻어 집에 돌아오니 쇠락한 옛집을 허물고 재개발에 나선다는 방침에 저항하는 열혈전사가 탄생한 장면을 아들은 목도한다. 그리고 그 전사를 바로 유웨이의 베이라오 출신 아버지였다. 붉은 천에 일필휘지로 쓴 시를 몸에 두르고, 집을 부수기 위해 돌진해 오는 불도저에 맞선 아버지는 자신이야말로 그 어떤 광저우 사람보다 더 광저우를 사랑했노라는 말로 자신의 광저우 사랑을 증명해 보인다.

 

<걸림돌>도 <아버지의 복수>에 이은 수작이다. 한 때 작가를 꿈꾸었지만 작가 대신 편집자가 되어 선전과 광저우를 오가는 주인공 리샤오콴이 기차를 타서 앉을 자리를 찾던 중에 만난 75세의 쑤뤄산 할머니왕 대화를 시작하는 순간, 비범한 이야기가 탄생할 거란 걸 직감했다. 샤오콴도 자신의 가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지만, 쑤 할머니의 그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외국인이지만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쑤 할머니는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계 유대인이었다. 어때 이 정도의 비범한 만남이라면, 속꺼풀 속에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이야기가 숨어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는 기본이 아닐까.

 

마치 탁구공을 치열하게 주고받듯이 쑤 할머니와 샤오콴 사이에서 자신들의 속 깊은 이야기가 오고간다. 비록 짧은 기차여행이지만, 여행이라는 일탈으로부터의 해방이 주는 릴랙스한 분위기가 두 사람을 한 마음으로 이어주었던 게 아닐까. 1938년 수정의 밤과 최종해결책이 횡행하던 시절로부터 7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걸림돌”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황동판을 들고 선전을 향하는 쑤 할머니의 모습은 마치 구도자의 그것처럼 다가왔다. 샤오콴이 던진 아우슈비츠가 “죽음의 본질”까지 바꾸지 않았느냐는 대사는 정말 압도적이었다. 기차가 선전역에 도착해서 바퀴의 느림이 느려지는 순간이 영원해지길 기원하는 왕웨이롄의 그 마음에 절절하게 와 닿는 것 같다. 불야성 홍콩을 바라고 목숨을 건 탈출을 하던 샤오콴의 조부모들의 모습은 지중해 바다를 건너는 시리아 난민들의 그것과 겹쳐 보인다. 슬프면서도 아름답고, 또 한편으로는 이해하고 공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

 

마지막 이야기 <베이징에서의 하룻밤>은 남방의 대학시절 만나 첫사랑을 공유한 중년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다. 거대한 수도에서 유능한 의사로 성공한 의대생과 역시 소설가로 활동 중인 문청이었던 청춘들의 회고담. 어떻게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그런 이야기지만 이야기꾼 왕웨이롄은 기존 중국 문혁시절의 작가들과는 다른 톤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철저하게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일체의 정치색을 배제한 인류 공통의 감정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에 대해 서투르고, 자신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철부지 시절의 추억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마치 화인처럼 그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어쩔 수 없이 어긋나는 관계는 이별로 이어졌지만 오랜 시간을 두고 꾸준하게 단절되지 않고 연락이 이어졌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건 아마 남자 주인공 자화의 루제에 대한 미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인연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이제는 중년이 된 자화의 고백들...

 

두 번째로 만나게 된 묘보설림 시리즈는 이번에도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다양한 장르의 서사물 홍수의 시대에, 어떻게 보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숭앙하는 바링허우 세대 작가의 고전적 작법을 구사하는 왕웨이롄 작가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올드스쿨 스타일의 독자다 보니 이런 우직한 승부가 마음에 들었던 게 아닐까. 작가의 말처럼 불행과 희망의 교차점에서 글쓰기의 영광이 도래하는 호시절을 기대해 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나무 2018-11-02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묘보설림 시리즈란 게 있었단 말이죠!
중국소설은 손이 잘 안가던데 이 소설은 우선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ㅎㅎ

레삭매냐 2018-11-02 21:40   좋아요 0 | URL
글항아리에서 인문서적만 내는 줄
알았는데, 소설도 내더군요.

묘보설림이라고 고양이 걸음으로 소설
의 숲을 걷는다라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시리즈랍니다.

왕웨이롄 작가의 책은 흥미로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