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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평점 :

아무래도 신간 <비바, 제인>에 앞서 개브리얼 제인 작가의 <섬에 있는 서점> 이야기부터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수년째 지속되고 달궁 독서모임을 뜨겁게 달군 <섬에 있는 서점>은 재밌으면서도 또 핍진성에서 부족하다는 지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을 도출한 그런 책이 아니었던가. 국내에는 아직 소개되지 않은 탐 드루리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미국의 대도시가 아니라 어쩌면 미국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 가장 미국적인 이야기들을 직조해내는 소설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소설의 출발점은 올해 64세의 레이철 셔피로의 온라인 데이트다. 제빈 작가의 소설적 장치 배치 실력은 확실히 뛰어나다. 그것은 마치 한 편의 추리소설 같은 구성의 전개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아무 의미 없이 그냥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한 자락 하는 스토리의 주인공이 주목 하시라. 심장전문의 닥터 마이크 그로스먼과 이혼한 전직 유대인 학교 교장 선생님은 노년의 싱글 라이프를 아주 여유롭게 즐기고 계신 중이다. 절친 로즈 호로위츠의 유리남 남편이 껄떡일 때도 있지만, 지혜롭게 넘기는 능력도 발휘해 주신다. 그녀의 어머니와 미미 이모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다. 어머니는 평생 독일에서 만든 제품은 사지 않는다는 방식으로 홀로코스트의 기억에 저항한다.
여기서 문제 돌발, 그녀의 딸 아비바 그로스먼이 출현할 차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마이애리 출신 멋쟁이 하원의원 에런 레빈과 바람이 난 것이다. 미래의 정치인 지망생인 아비바는 예전 이웃인 레빈 의원실의 무보수 인턴으로 지원했다가 그만 그런 사단이 나고 말았다. 그냥 조용하게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이, 불행은 항상 홀로 오는 법이 없다는 식으로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전도유망하고 미남 하원의원의 섹스 스캔들은 전국적 이슈가 되었고, 아비바가 재미로 쓰던 블로그는 성지가 되고 그야말로 스티그마타가 되어 버린다.
소설 <비바, 제인>에는 모두 5개의 시선이 등장하는데 눈치 빠른 독자라면 원제 <Young Jane Young>에서 언급하는 ‘제인 영’이 과연 누구일지 벌써 알아챘을 지도 모르겠다. 싱글맘으로 플로리다에서 심리적으로 가장 멀어 보이는 메인 주의 앨리슨 스프링스에서 랍스터 롤을 즐기는 제인 영과 그의 딸 루비가 등판할 순서다. 행사 기획자이자 웨딩 플래너로 활동 중인 제인 영이 바로 자신의 신분을 철저하게 세탁하고 새롭게 거듭난 아비바 그로스먼이었다. 어쩌면 개브리얼 제빈 작가는 가장 페미니스트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페미니즘 전사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싶었던 게 아닐까.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아비바의 할머니, 커리어 우먼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엄마 레이철 셔피로와 아비바/제인 영 그리고 루비 4대에 걸친 여성들의 세상을 향한 투쟁은 그야말로 부단하기 그지없다. 제인 영이 한 때 자신의 손님이었던 전형적 꼰대 웨스 웨스트의 시장 선출을 저지하고자 지역 유지 모건 부인의 지원 아래 어쩌면 자신의 정체가 들통 날 지도 모를 그런 위험한 시장 선거에 뛰어드는 결정은 참으로 담대했다. 물론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어서, 십대 소녀 루비가 구글링을 통해 자기 엄마의 정체를 알고 자신의 생부라고 믿는 레빈 의원을 찾아가는 장면은 일종의 클리셰라고 해야 할까.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철부지 인턴의 불장난 혹은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잘 나가는 하원의원을 파멸시키려는 꽃뱀으로 모는 시선도 엄연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소위 말하는 ‘슬럿 셰이밍’이라는 비겁한 방식으로 가족을 제외한 그 어느 누구도 아비바 편에 서지 않았다.
그 결과 대학에서 스페인어와 정치학을 전공한 여성의 커리어는 산산조각이 나고,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멀리 메인에서 할머니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야 했다. 그것도 싱글맘이라는 소수자의 입장에서 말이다. 제인 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 만든 아비바는 세상의 모든 편견과 맞서 싸워야했고, 결말에 이르기까지 진행형이다.
이 소설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시선과 캐릭터는 바로 에런 레빈의 아내이자 여걸 변호사 엠베스였다. 그녀는 여느 정치인의 아내처럼, 남편의 바람에도 그를 지지한다는 마음에도 없는 연기를 펼쳐야만 했다. 그 결과 정치인 레빈은 자신의 지역구에서 20년 동안 10선 의원이라는 정치적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남편 에런 레빈은 인간적으로는 이제 막 성인이 된 대학생 인턴과 바람난 ‘그로스먼’ 같은 인간이지만, 정치적으로 탁월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그만큼 사랑받았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노라고 엠베스는 고백한다. 문제는 그런 어마무시한 스트레스를 안고 살다 보니, 세상에 존재하는 않는 앵무새 엘 메테라는 존재를 통해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었다는 것이다. 엠베스 여사가 갑자기 나타나서 레빈 의원의 선거를 한 방에 날려버릴 지도 모를 루비의 출현에 대처하는 장면은 확실히 지난 미국 대선에 나섰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연상시켰다. 아니 어쩌면 엠베스 여사의 모델이 바로 그 이가 아니었던가 싶을 정도로. 돌이켜 생각해 보면, 현실이 어쩌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게 아닐까.
원래 <비바, 제인>은 추석 때 읽을 계획이었는데 읽다 보니 추석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뭐 프리-추석용 독서로도 제격이었지 싶다. 그렇게 시간을 번 나는 추석 때는 다른 책을 읽게 됐다. 우리가 언제 읽을 책이 없어서 고민한 적이 있었던가. 읽은 시간이 없어서 문제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