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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평점 :
69쪽 이렇게 늙고 병들었는데도,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있는 곳은 여전히 그 봄밤의 태영음반사야
1971년의 봄 서군의 이미지를 사랑한 나의 스무살 고모. 45년의 기나긴 세월
98쪽 (여전히 불의가 횡행하는 시절에) 나만의 의식적 함몰구역이 존재한다
한나와 안수 리의 이야기
1967년 동백림 사건, 니체 철학을 연구하는 박사과정 학생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을 출입한 한국 사람들을 밀고한 스파이 - 안수 리
지난 1월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기 시작했는데, 미처 다 읽지 못하고 반납했다. 이번 주말 독서 모임 책으로 선정돼서 읽어야 해서 어제(7월 10일)부터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그 때 한 절반 가량 읽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일까? 반가운 기시감에 진도가 쑥쑥 나간다.
최근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나 손보미 작가의 <디어 랄프 로렌>에서처럼 한국 소설의 소재와 배경은 더 이상 한국적인 공간이나 주인공들이 아니구나 싶다는 트렌드가 읽혀졌다. 조해진 작가의 <빛의 호위>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글로벌 시대에 발맞춰 미국의 뉴욕으로 그리고 베를린으로 마구 뻗어 나가는 기세다. 표제작 <빛의 호위>에서도 벨기에와 팔레스타인 그리고 뉴욕을 넘나드는 그런 공간 점프를 선보이지 않던가. 친구 권은에게 전달한 카메라가 그녀의 인생을 뒤바꾸게 하리란 것을 화자는 과연 알았을까. 현재의 비극도 어쩌면 그 카메라 덕분에 발생한 게 아닌가. 쌩뚱맞게도 작가가 사진에 대해 잘 모르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말하는 ‘빛의 호위’가 카메라 셔터 작용에 따라 필름에 감광되는 건 맞지만, 우리가 직접적으로 사진의 이미지를 보게 되는 건 현상한 필름을 통해 빛이 쬐어진 인화지라는 걸 말이다. 인화액에 담겨진 인화지 속에 흐릿한 이미지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진짜 사진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을수록, 무언가 묘한 이물감 내지는 괴리감이 느껴진다. 나같은 보통 사람이라면 일상에서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예술가들의 잦은 등장이야 소설 제조를 위한 방법론이라 치고, 우연히 본 사진을 보고 작업을 하게 된 재미 교포 화가의 초대를 받아 물설고 낯선 미국의 플러싱을 찾는다는 설정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나. 심장병을 앓는 동생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무역회사에 다니다 만난 남자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강도를 만나 객사한 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언니, 잘 가>도 그렇다. 그들의 절절한 사연에는 공감하겠지만 언니의 부고를 듣고 미국을 찾았다가 현지에서 만난 인도계 미국인 남자와 살게 되었더라고. 이거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소위 핍진성이 결여된 게 아닌가. 우리네 삶의 팍팍한 이면에 메스를 대듯, 파고드는 내러티브에 호감을 느꼈던 독자는 뒷걸음치게 된다.
58쪽 망각을 거부하는 것... 안젤라의 마지막 선물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사회 생활에 지쳐 미국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나겠다는 말에 덜컥 적금을 깨서 내주었다가 낭패를 당한 여자가 남자를 찾아 미국으로 갔다는 이야기는 또 어떤가. 자신에게 아무런 언질도 없이 미국으로 떠난 남자에게 미련이 남아 있는 걸까? 아니면 돈을 못받게 되어 채권자 자격으로 그 남자의 집을 찾은 걸까. 후자라면 고소 고발이라는 절차가 있지 않나? 철저한 이방인 신세로 맥주를 벗 삼다 만난, 청소 용역직원 안젤라와 뚝뚝 끊기는 대화 속에 서로 교감할 수 있었노라는 이야기도 참.
122쪽 가능성은 실패하고 좌절할 확률과 비례한다는 의미
개인적으로 조해진 작가의 <빛의 호위>에서 수작은 <산책자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철학 강사/교수로 활동하다가 대학 구조조정의 희생자가 되어 새로 개발된 도시 변두리의 편의점에서 카운터 직원으로 일하는 홍미영 씨의 이야기다. 당연히 벌어 놓은 돈은 없고, 병들어 돌아가실 날만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운명, 비정규직으로 신산한 삶을 살아야 하는 전직 강사님의 이야기는 21세기 한국 사회가 뽑아낼 수 있는 신파의 최대치가 아니었을까. 슬프다 슬퍼. 잠시 육신의 안분지족을 위해 홀아비 편의점 주인과의 로맨스를 꿈꿔 보기도 하지만, 꿈깨시오 올시다. 소설을 더 맛깔나게 만드는 건, 중국 유학생 제자 메이린이 라오슈(노스승)의 안위를 걱정하면서 독일 유학 중에 보내오는 이메일 메시지다. 한국 유학 시절 이미 꽃같은 동료 이선의 죽음을 체험한 메이린은 라오슈마저 그런 운명에 처하는 게 아닌가 하며 걱정이 앞선다. 그런데 뒤에 가서 밝혀지는 진실은 메이린이 걱정하는 건 라오슈의 안위가 아니라, 소통과 거절의 연속 가운데 라오슈마저 세상을 등지게 되면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삶의 무게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솔직한 이야기를 뽑아내다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산책자의 행복>의 광휘가 워낙 강렬하다 보니 다른 작품들은 죄다 이 작품의 그늘 속으로 숨어 들어가 버린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나머지 소설들에서는 전 세계로 퍼져 디아스포라된 한국인들의 이미지와 죽음이라는 방식으로 소멸해 가는 이야기들을 엿볼 수가 있었다. 6살 때 철도길에서 발견되어 저 멀리 프랑스로 입양된 한국계 프랑스 처자 정문주 혹은 나나가 직면하게 되는 복희식당 할머니의 소멸. 유한한 존재의 당연한 소멸은 참으로 서글픈 현실일 수밖에 없다. 소멸에 대한 현실 인식은 허무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노동현장의 크레인에서 떨어져 장이 파열되어 죽은 동료 송의 자리를 대신하고 싶었던 펄떡 거리는 욕망을 드러내는 남자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역시 어머니에게 버림 받은 균은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워한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 대신, 죽은 동료의 어머니가 해주는 뜨거운 밥상을 받고 싶다는 애정에 대한 갈망을 날것 그대로 상에 올리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책을 읽으면서 리뷰에 담으려고 몇몇 구절을 표시해 두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 보니 감상들이 모두 휘발되어 버려, 글로 풀어내기가 어렵다. 작품의 편차가 있다고 해야 하나. 어떤 작품들은 좋고 또 어떤 작품들은 그렇지가 않다. 무시로 등장하는 해외 이야기/디아스포라의 전개가 나는 왜 그렇게 불편하게 느껴진 걸까. 지구촌이니 글로벌리즘이니 하는 서사구조가 내게는 생래적으로 맞지가 않는가 보다.
어쨌든 책은 이제 다 읽었으니 나머지는 내일 달궁 독서모임에 가서 들어 보도록 하자. 과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