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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뒤에서 ㅣ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6월에 책을 생각보다 조금 읽은 듯해서 도서관에 들른 길에 얇은 책 한 권을 빌려왔다. 조르조 바사니의 신간 <문 뒤에서>. 첫 10페이지를 열심히 읽고 묵혀 두었다가, 어젯밤에 머리맡에서 굴러다니던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요즘 로맹 가리의 <별을 먹는 사람들>에 빠져 있었는데, 그 책을 찾을 수가 없어서 대체품으로 삼은 셈이다. 그리고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읽다가 월요일 출근길이 힘들었다.
작가들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자신의 삶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이야기라고 하는 걸 들었는데, 조르조 바사니의 경우에는 죄다 헛소리라는 느낌이다. 이탈리아의 도시 페라라를 배경으로 한, 유대계 가정의 이야기들. 제발트 선생이 수작이라고 극찬한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은 미처 다 읽지 못했는데, <문 뒤에서>에서도 뭐랄까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 주도로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기 전 좋았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슬며시 파고 들어온다.
16세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의 상처 혹은 아픔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물지 않았다는 고백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1929년에서 1930년 즈음에 소설의 내레이터인 나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중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친했던 친구 오텔로 포르티가 낙제하면서, 나는 새로운 반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들어야 했다.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친구들의 이름이 기억의 저편에서 날듯 말듯 아련하게 부침을 계속한다. 나도 그랬던가?
우리는 국영수에서 좋은 점수를 얻는 게 미래의 성공을 위한 보장이었다면, 이탈리아 청소년들에게는 이탈리아어, 라틴어와 그리스어 그리고 기하학이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던 모양이다. 우리에게는 낙제가 없어서 유급의 공포는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가혹할 만큼 성적의 압박이 존재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유급이라니. 우리가 공부하는 고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서구 교육 시스템(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에서 고전 그리스어와 라틴어(특히 이탈리아어!)의 비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습득한 라틴어로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를 읽는다고 생각해 봐라,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은가.
또 이야기가 언제나 그렇듯 샛길로 새버렸다. 어쨌든 유대인 의사 가정의 부유한 부르주아 계급 출신의 나는 소위 전교1등 카를로 카톨리카와 같이 숙제도 하고 어울리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시달린다. 다만 소년의 자존심은 자신이 먼저 그 잘난 카톨리카에게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정통 가톨릭 교도인 카톨리카가 유대인 소년인 자신과 어울리는 걸 의도적으로 기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 뿐. 서구 지식인 사회 그리고 조르조 바사니가 그렇게 사랑한 페라라라는 작은 도시에서도 여전한 반유대주의의 잔향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는 동안, 전교1등의 완벽한 대체재 루차노 풀가가 등장한다. 내 가정과는 달리 시골 보건의 출신인 풀가네 가족은 아들이 당장 학교에서 공부할 교재를 살 돈마저 부족한 상태다. 부유한 내가 상대방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일까. 자본의 소유관계로 스스로 어울리는 계급을 짓는 소년들의 모습에서 전간기 이탈리아의 실체를 슬쩍 엿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와 풀가 그리고 카톨리카는 행복한 결말을 맞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소설의 처음에서 밝혔듯이 어떤 식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청소년기의 깊숙한 생채기를 남기게 되었다.
어떤 기회에 친해지게 된 카톨리카는 나에게 루차노 풀가가 나에 대한 지독한 험담을 하고 다닌다는 알려준다. 사실을 부인하고 싶은 나에게 카톨리카의 표정은 진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카톨리카와 그의 일당들은 험담의 현장을 나에게 들려줄 계획을 공모한다. 그들이 셋업을 마치면, 나는 “문 뒤에서” 진실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제목이 <문 뒤에서>였구나. 나는 알고 싶지 않은, 아마도 관계의 파국을 초래할 진실을 회피할 자신이 있을까? 나이가 드니 알고 싶지 않은 혹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은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어쩌면 조르조 바사니는 페라라라는 공간과 유대인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삼아 소년에서 성인으로 성장해 가는 과도기적 시절의 성장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게 아닐까. 루차노 풀가를 통해 듣게 된 자신의 성적 정체성과 어머니에 대한 모욕에 가까운 험담은 역설적으로 평범한 자신의 가족사를 지상으로 끌어 내린 게 아닐까. 조숙한 소년 풀가는 철부지 소년이었던 나에게, 어렴풋이 알고 있던 남녀상열지사의 비밀과 마스터베이션의 쾌락을 알려 주기도 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보면 정말 간단한 이야기를 전간기 이탈리아의 시대상에 적절하게 비비고, 극도로 예민하고 혼란스러운 청소년기 소년의 감정에 이입해서 새로운 카오스를 만들어낸 조르조 바사니의 창작력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이 정도로 내레이터 감정의 농밀한 기저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의 묘사가 가능한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조르조 바사니의 책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나올지 모르겠지만, 소 되새김질하듯이 천천히 그렇게 읽어볼 계획이다. 그 전에 앞서 읽다 만 <핀치콘티니가의 정원>부터 읽어야겠지.
[뱀다리] 그리고 한 작가의 저작들에 대한 번역은 가능하면 동일한 역자가 맡아 주었으면 한다. 헤르타 뮐러 꼴이 나지 않으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