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창비세계문학 40
마리오 베네데티 지음, 김현균 옮김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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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사둔 책인데(무려 3년 전에!) 나의 서가에서 읽히지 못하고 있다가 지난 주에야 비로소 책장에서 빛을 보게 됐다. 마리오 베네데띠, 처음 들어보는 우루과이 출신 작가라고 한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 퇴직 7개월을 남긴 49세의 홀아비 마르틴 산토메가 일년 남짓 기록한 퇴직 일기로 우리는 그의 삶과 대면하게 된다.

 

자칭 허름한 자동차 부품 수입회사에 다니는 마르틴은 아내 이사벨과 사별하고, 남은 세 명의 자녀들과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녀들과의 불통은 일상이다. 언제나 그렇듯. 왜 소설에서 자녀들과 원활한 소통을 이루어지는 가정이라도 등장하면 큰 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마르틴은 평생을 가족을 위해 직장과 사회에서 고군분투해 왔지만, 자신에 행복에 도움이 되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아마 대답할 자신이 없지 않을까. 심지어 강압적이었노라고 일기에 적고 있다. 뭐 사는 게 다 그렇지.

 

은퇴를 목전에 둔 마르틴 부장님에게 회사의 경영상태를 나타내는 수치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부분을 읽는데, 왜 그렇게 절절하게 공감이 되던지. 냉정하게 말하자면, 나의 이익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의 꼰대 부장님은 자신에게 배당된 신입 직원들의 성향과 외모로 엉큼하게 판단하기도 하고, 근무 시간에 땡땡이를 치기도 하고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여자들의 몸매를 평가하기도 한다. 선을 지키는 홀아비라고 해야 할까. 앞으로 또 어떤 이야기가 등장할 지 몰라 섣불리 평가하기도 그렇다.

 

난 살아오면서 도대체 뭘 한 걸까

 

그런데 이 책 읽으면 읽을 수록 재밌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 마르틴 산토메의 일기를 통해 독자는 그의 삶을 반추해 보게 되는 것이다. 21년 전에 요절한 아내 이사벨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엄마를 그리워한다고 하지만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모르는 다 자란 아이들의 심정에 대한 묘사, 느닷없이 등장해서 마르틴의 삶 속에 뛰어든 어린 시절 친구라는 아도낀 비그날레를 사랑하는 처남댁 이야기 등등. 몇 푼 안되는 회계 장부의 오차 금액을 맞추기 위해 부하직원들에게 야근을 지명했다가 곤경에 처하는 장면은 오늘날의 그것과 비교해서 다를 바가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말이다.

 

문제는 신인 보조직원 아베야네다 양과의 관계가 전면으로 부상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렇지 치정이 빠지면 소설이 재미가 있나 그래. 자신의 딸인 블랑카와 비슷한 또래에 대해 연정을 품다니 양심도 없는 중년 같으니라구.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마르틴 아저씨가 엄청 어린 연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되고, 위기로 치닫던 가족 관계 역시 일대 전환을 맞게 되었다는 점이다. 오 놀라운 전개로군.

 

62쪽에서 사무실 직원 산티니 보고 “왜 여태 사무실에 호모가 없나 했어”라며 자조하던 마르틴의 가족 역시 성적 정체성의 위기는 피해갈 수가 없었다. 죽은 아내 이사벨을 가장 닮은 막내 아들 하이메가 커밍아웃을 한 게 아닌가. 1950년대 말을 살던 어머니 역할마저 감당한 가부장적 이미지의 아버지 마르틴은 당연히 커밍아웃을 한 아들을 이해할 수도 그리고 용서할 수도 없다. 무신론자이기에 아마 신을 원망할 수도 없었겠지. 물론 이런 일종의 사적 포석들은 훗날 그가 진짜 대면하게 되는 비극의 전조였을 지도 모르겠다.

 

소설가라기 보다 시에 주력했던 마리오 베네데띠의 <휴전>은 좀 이른 은퇴를 목전에 둔 중년 남자의 삶의 위기를 전면에 내세운다. 아내는 임신중독증으로 오래 전에 죽었고, 아들 놈 하나는 커밍아웃을 하고 집을 나갔으며, 마초 큰아들과의 불화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마지막으로 사무실의 젊은 여직원과의 걷잡을 수 없이 빠져 들어가는 관계 역시 문제다. 되돌릴 수 없는 젊음에 대한 미련은 라우라 아베야네다의 미래가 순탄치 않을 거라는 전망에서부터 비롯된다. 젊은 연인을 위해 그 어떤 약속을 해줄 수도 없다는 현실적 문제. 그나마 블랑카는 사랑에 빠진 아버지를 이해해 주지만, 어머니의 부재 가운데 게이가 된 막내아들 하이메는 아버지가 ‘호린’ 젊은 새엄마 후보를 비난하면서 가출해 버리지 않았던가. 자자,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과연 마리오 씨가 어떤 결말로 우리들을 인도할 지 궁금해질 것이다. 충격적인 엔딩이 기다리고 있으니 부디 읽어 보시길. 소설이 클리셰이로 접어들 무렵, 작가가 준비한 거친 한 방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한테서 제일 마음에 드는 건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어떤 것이에요. (145쪽)

 

진짜 멋진 고백이 아니던가. 오래 전에 지나가 버린 청춘을 회생할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경험 많은 남자에게 이런 고백만한 게 있을까 싶다. 우리의 염세주의적 몽상가 마르틴 아저씨는 어떤 비극을 맞이한 후, 더 이상 일기를 쓸 수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원제 <La Tregua>는 “휴전”이라기 보다 다른 뜻인 관계의 중지 혹은 은퇴를 상징하는 휴식으로도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들이 들었다. 굉장히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싶다. 진짜 멋진 소설이다, 주위에 권해 주고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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