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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조자 1
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책쟁이로서 퓰리처상이니 맨부커상,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아우라로부터 탈출할 방법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처음 들어보는 미국작가인 비엣 타인 응우옌의 책 <동조자>를 선택해서 읽게된 첫 번째 이유는 아마 그것일 테고, 두 번째 이유는 지난달에 읽은 베트남 참전 용사가 기술한 <전쟁의 슬픔>과 비교해 보고 싶은 이유였다. 하나 더 추가해 보자면 베트남전쟁에 대한 관심 정도.
소설 <동조자>의 시간적 배경은 1975년 4월이다. 그러니까 적군 18개 사단에 포위된 사이공 함락을 눈앞에 두고, 프랑스 가톨릭 사제 아버지와 베트남 하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스스로를 “잡종 새끼”라고 부르는 베트남군 병참 장교(실제로는 비밀경찰)의 자술로 시작된다. 화자는 확실히 문제적 인간이다. 베트남전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디엔비엔푸 전투 후, 월남으로 도생한 나는 CIA 요원인 클로드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다. 하지만 십대 시절에 이미 그는 지기 만과 민족해방에 자신을 희생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니까 그는 스파이이자, 고정간첩 그리고 CIA 요원이기도 했다. 일단 응우옌 작가는 그의 혈통만큼이나 복잡한 캐릭터를 ‘나’에 심는데 성공했다. 베트남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 사람들이 스스로를 대변할 수 없다는 <더 햄릿> 영화판에서의 고민처럼, 나의 일생 자체가 복잡다단했다.
나는 비밀경찰을 지휘하는 장군 휘하에 들어가 부관으로 뛰어난 실력으로 장군의 신임을 얻고, 숱한 정보들을 북쪽의 자신의 동지들에게 넘긴다. 투철한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친구 만이 있다면, 또 한편에는 공산주의자에게 아버지를 살해당한 친구 본이 있다. 우정과 이데올로기를 가로지르는 주인공의 정체성이야말로 소설에서 정확하게 타격하고 있는 지점이 아닐까. 베트남전쟁에 참가한 수많은 선수들이 자신이 믿는 조국을 위해 싸웠다. 사이공 함락의 날, 탄손누트 공항에서 악착같이 저항하는 베트남 공수부대를 상대로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면서 기록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바오 닌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문득 제목 <동조자>가 주는 어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무엇에 대해 동조한 사람을 가르키는 말일까하고.
다시 사이공 마지막 날로 돌아가 보자.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만은 현지에 남기로 하고, 나(혁명가답게 독신이다)와 본의 가족 그리고 장군 가족은 미군 수송기 허큘리스를 타고 사이공 탈출에 나선다. 사이공 탈출이라는 극적인 장면을 주인공에게 부여한 설정도 놀랍다.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M-16을 든 거구의 양키들에게 처참한 패배의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잡종 새끼인 내가 그 임무를 맡은 것은 정말 탁월했다. 동시에 패배까지도 껴안을 수 있는 미국 문학의 힘을 보았다고나 할까. 저자 응우옌 역시 베트남 출신이긴 하지만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포스트워 세대가 아닌가. 거의 전 세계이 모든 문화적 용광로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문학판의 위력을 소설 <동조자>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좋았던 시절인 사이공 함락에 있어 비극이 빠질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저자는 본의 아내 린과 아들 덕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오랜 경구답게 어디서 날아온 총탄인지 모를 그런 총탄을 죽은 아내와 아들의 시신을 껴안고 거의 울부짖으며 허큘리스 비행기에 간발의 차이로 매달리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이 소설은 거의 반드시 영화화된다고 해도 좋을 듯 싶다. 주인공 나의 캐스팅은 대니얼 헤니 정도가 좋지 않을까 추정해 본다.
이제 무대는 괌을 거쳐 미국 캘리포니아의 임시수용소로 이동한다. 미국 학위를 가진 나는 재빠른 속도로 미국 사회에 안착한다. 렌탈 숙소, 자동차 그리고 일자리의 삼위일체로 무장한 나는 미국 사회에 융합하기 시작한 베트남 난민들보다 우월한 지위에서 반동적이고 불온한 움직임을 탐지하는 역할을 지속하게 된다. 베트남에서의 전쟁은 끝났지만, 시퀄은 끝나지 않았다는 진단이다. 내가 대학으로 돌아가 보니, 그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맹렬하던 베트남전쟁 반대를 하던 세대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해서 떠나 버렸고 새로 입학한 학생들에게 베트남전쟁은 태평양을 가로 지르는 거리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는 것을 듣는 순간,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구나, 시간은 모든 것을 망각의 샘으로 인도하는구나.
<동조자> 첫 번째 권의 내러티브는 사이공 함락, 미국 사회에 재적응하기 그리고 <더 햄릿> 영화촬영으로 이어진다. 사이공 함락 후, 구 월남정권에 부역한 이들을 재교육이라는 가혹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었다면 미국에서 임시수용소라는 신병교육대가 난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장군이나 나같은 이들에게는 재교육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를 의미했다. 뒤늦게 자신의 주변에 북베트남 스파이가 없었는지 의심하게 된 장군에게 나와 본은 무절제한 소령을 미끼로 던져주기에 이른다. 무고한 사람을 죽여야 하는 임무에 잠시 고민하기도 하지만, 조국에서 민족해방이라는 대의 앞에 죽은 무고한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었던가. 이른 나이게 미국 생활을 통해 이종교배된 장군의 딸 라나의 등장도 주목할 만하다. 사고와 의식은 완전하게 미국적이지만 여전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나 할까.
마지막 에피소드는 내가 기술 컨설턴트로 참가하게된 작가주의 영화 <더 햄릿>의 촬영장이다. 촬영현장에서 나는 인종주의 전쟁이었던 베트남전쟁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한 작가주의 감독과 열전을 벌인다. 이 과정은 서구인들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피상적 이해를 예리하게 타격한다. 어쩌면 작가주의 감독이 카메라워크를 통해 구사하는 모든 것들이 프로파간다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씨퀀스들은 어쩔 수 없이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걸작 <지옥의 묵시록>을 연상시켰다. 부랴부랴 영화를 구해서 바그너의 <발퀴리의 비행>이 나오는 미군 헬리콥터 부대가 베트남 사람들을 학살하는 장면을 골라봤다. 하늘에서 그러니까 신의 시선에서, 이제 막 징병되어 전선에 투입된 어리숙해 보이는 미군들이 민간인들에게 기총 소사하는 장면은 비극의 재현일 수밖에 없었다. 진격 나팔 소리와 함께 건국의 아버지들이 인디언들을 향해 기병대를 출동시켰던 것처럼, 말을 대신할 헬리콥터로 가상의 적을 소탕하는 장면이라.
영화 촬영장에서 단역에 동원된 베트남 사람들이 베트남전쟁에서 궁극적 승리자였던 자신들을 대변하지 못하고 고작 일단 1달러에 자신을 팔아야 하는 현실은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그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 인민들에 대한 왜곡과 명백한 승리의 훼손이었다. 카메라 렌즈로 필터링된 이미지가 어떻게 리얼리티를 담보할 수 있단 말인가? 절대 인정할 수 없다. 그리고 소설에 어딘가에 작가가 기술한 대로, 군산복합체의 일원인 할리우드가 제작한 영화는 베트남전쟁의 시퀄이자,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전쟁에 대한 프리퀄이었다는 진단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또 한편으로는 베트남 현지에서 그들이 쟁취한 승리는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과 자유세계로 후퇴한 반동세력에 대한 우려는 나의 존재로 설명되지 않던가. 패배한 이들도 그리고 승리한 이들도 모두 전쟁의 후유증인 극심한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숨가쁘게 첫 번째 <동조자> 1권을 읽었다. 원래 같으면 바로 2권을 사서 읽어야겠지만 다음달부터 산 책부터 소득세공제를 해준다고 하니 앞으로 책 사기는 모두 일주일 뒤로 미룰 생각이다. 나머지 부분에서는 사이공 탈출 때는 목숨은 건 친구이자 전우였지만, 알고 보면 불구대천의 원수인 본과 나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지, 베트남에서 출발해서 미국을 거쳐 과연 최종 종착지는 어디인지 그리고 자술하는 대상은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기대해 본다.
[뱀다리] 어제 읽은 신문 인터뷰에 의하면 응우옌 작가의 <동조자>의 후속편을 기획 중에 있다고 한다. 아버지의 뿌리인 프랑스 파리를 찾은 나의 1980년대가 시공간적 배경이라고 한다. 그전에 올해 발표된 응우옌 작가의 소설집 <난민들>도 빨리 국내에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