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톨의 밀알
응구기 와 시옹오 지음, 왕은철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누가 어떤 책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항상 하는 대답이 있다.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의 책과 제3세계 작가들의 책을 좋아한다고.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이야 루이스 세풀베다나 로베르토 볼라뇨,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같이 특정한 이름을 대겠지만 제 3세계 작가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중에 노벨문학상 후보로 꾸준하게 언급되고 있는 케냐 출신의 작가 응구기 와 시옹오는 그나마 유명세를 탄 덕분에 우리나라에 그의 대표작들이 소개되고 있다. 이번에 만난 응구기 와 시옹오의 <한톨의 밀알>은 포스트 콜로니얼 시대를 그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관심이 갔다.

 

<한톨의 밀알>의 시공간적 배경은 독립을 앞둔 케냐다. 영국 식민주의자들에 대항해서 봉기를 일으켰던 기쿠유의 마우마우단 운동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들어 알고 있었다. 19세기말 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전 세계를 멋대로 지배하던 시절, 동부 아프리카의 케냐 역시 해가지지 않는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백인 지배자들은 케냐의 비옥한 토지를 차지하고, 흑인들을 형편없는 임금으로 자신들의 대농장에서 착취했다. 또 히틀러와의 전쟁에서는 그들을 동원해서 전쟁까지 치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도도한 민족자결의 역사 앞에 케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왜, 조상들의 땅을 백인이 차지하고 우리는 노예와 같은 처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가. 조모 케냐타로 대변되는 흑인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응구기 와 시옹오의 논픽션 리얼리즘 소설에는 다양한 갈등이 녹아 있다. 우선 백인지배자와 흑인피지배자 간의 어쩔 수 없는 갈등이 그 첫 번째다. 식민 종주국 영국은 독립을 염원하는 케냐 사람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무력을 동원해서 그들을 진압한다. 비상사태 선포로 백인들에게 끌려갔다가 수년간의 수용소 생활을 마치고 룽가이 마을에 돌아온 무고는 졸지에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영웅이 된다. 물론 무고 이전에 아예 대놓고 백인 지배자를 상대로 무력투쟁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처형된 키히카도 있다. 독립을 앞둔 기쿠유 전사들은 키히카가 밀고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복수를 다짐한다.

 

두 번째 갈등은 백인의 지배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편에 붙은 마을 자치대장이 된 카란자와 그에게 사랑하는 아내 뭄비를 빼앗긴 기코뇨의 그것이다. 기코뇨가 악몽 같았던 긴 수용소 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던 바로 뭄비에 대한 절절한 사랑의 힘이었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수용소에서 풀려나 마을에 돌아왔을 때 그를 반긴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카란자는 맹세를 어기고, 살기 위해 배신의 길에 들어섰다. 기코뇨는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오로지 돈버는 일에만 몰두했다. 영국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을 때,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백인의 땅을 사겠다는 그의 꿈은 정치모리배의 획책으로 어그러진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독립이고 해방이었단 말인가?

 

바로 그 지점에서 응구기 와 시옹오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위대한 기쿠유 독립투사 키히카의 죽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누가 키히카를 배신하고 백인에게 밀고를 했단 말인가? 소설에 나오는 모든 정황 증거는 자치대장 카란자를 가리킨다. 물론, 이 미스터리가 그렇게 쉽게 풀릴 거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개인적으로 <한톨의 밀알>은 한 시대를 구분 짓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열등한 민족이 국가 경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식민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종래의 서구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 거부하면서 탈식민주의의 신호탄을 날린다. 물론 미숙함 때문에 시행착오도 겪을 수 있겠지만, 자연의 섭리와도 같은 민족자결주의 앞에 이런 주장은 힘을 잃는다. 기쿠유 사람들은 주장한다, 왜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백인들이 우리 조상의 땅과 그 땅에서 나는 산물을 차지하느냐고. 어쩌면 우리와 비슷한 역사적 경험 때문인지 몰라도, 그들의 주장에 더 공감이 갔다.

 

책의 제목인 <한톨의 밀알>을 작가 응구기 와 시옹오의 조국 케냐 독립을 위해 가혹한 압제자의 폭력 앞에 수없이 스러져간 독립투사 아니 보통사람들의 삶에 대입해 보았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다는 거창한 말 대신 묵묵히 ‘맹세’를 지키며 대의를 위해 싸운 이들이야말로 그들이 그토록 애타게 찾던 진짜 영웅이었노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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