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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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판단이 틀렸다. <베어타운>의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전작 <오베라는 남자><할미전>이 퀼트 이불조각꿰기 같은 시트콤 스타일의 소설들이었다면 신작 <베어타운>은 새롭게 단장한 정극 드라마 같은 스타일이었는데, 소설의 1/3 지점 그러니까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느슨하면서도 장황한 소개 때문에 판단착오를 일으킨 모양이다. 경제가 쇠락해 가는, 하키를 거의 종교의 수준으로까지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곰들이 사는 베어타운의 추악한 실체가 드러나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하긴 그전에 영화로 만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도그빌>도 아마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물질과 승리만을 추구하는 매모니즘에 몰입된 인간들의 욕망을 프레드릭 배크만은 정확하게 저격한다.

 

헤드 같은 도시 사람들이 거지타운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베어타운의 경제는 날이 갈수록 몰락해 가는 와중이다. 어려서부터 스케이트로 얼음을 지치켜 하키 전사로 성장한 청소년들의 탈출구는 베어타운 하키팀의 단장 페테르 안데르손처럼 큰 무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NHL이나 A팀 선수가 되는 것 뿐이다. 도태된 이들은 아무런 기술도 없이 침울한 표정으로 공장에서 일하는 것 밖에는 선택지가 없다.

 

시대는 영웅의 탄생을 기다린 모양이다. 17세 소년 케빈 에르달의 천재적 능력과 눈부신 활약으로 베어타운 청소년팀은 4강에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베어타운의 사람곰들은 제각기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팀을 이끌어온 나이든 코치 수네의 자리를, 오직 승리만 추구하는 젊은 코치 다비드로 바꾸는 일로부터 시작해서 승리가 가져다줄 달콤한 약속에 젖어 들기 시작한다. <베어타운>이 미국 아마존에서 상당히 많은 판매고를 기록했다는 광고를 본 것 같은데,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4대 스포츠 중의 하나인 아이스하키를 소재로 다루면서 동시에 그네들이 좋아라하는 디테일에 집중한 점을 들어 나는 프레드릭 배크만이 독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짚어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베어타운은 겉보기에 평화로운 시골 마을처럼 보이지만 거주지부터 철저하게 자본의 유무에 따라 나뉜 계급사회다. 하이츠와 할로 사이의 거리는 지구별과 달에 견줄만하다. 물질에 대한 탐욕이 넘실대기는 지구별의 그 어느 장소에 비할 바가 아니다. 배크만 작가는 우리에게는 사회복지 천국이자 지상낙원으로 알려진 스웨덴도 인간의 욕망이라는 도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베어타운의 청소년들에게 욕망의 탈출구가 아이스하키라는 스포츠 종목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태생적으로 성공의 출발선이 다른 이들에게 그나마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스포츠야말로 유일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는 반증이려나. 물론 그들이 신 이상으로 숭배하는 아이스하키 역시 후원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자본의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 치명적 약점이긴 하지만. 하긴 우리 사회에서도 제일가는 재벌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언론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언론사 간부들을(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돈으로, 선물로 그리고 공연티켓으로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는 중이다. 케빈 에르달의 성폭행 사건이 뉴스가 되었을 때, 기자들의 자유로운 취재를 방해하려는 베어타운 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라. 그들의 모습과 2018년 어느 민주공화국의 모습이 한치의 오차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이 소설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베어타운에는 곰들이 산다 아주 비겁한

 

소설 <베어타운>은 케빈의 성폭행 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클라이맥스로 치닫기 시작한다. 단지 거지타운의 승리를 다룰 거라는 나의 예상은 이미 보기 좋게 벗어나 버렸다. 이제는 모두의 묵인 아래 야수가 되어 버린 케빈 일당에 맞서는 마야 안데르손 가족과 일말의 이성과 양심을 이들의 대결구도가 형성된다. 배크만 작가에게 크게 한 방 먹은 느낌이다. 이런 기가 막힌 에피소드가 뒤에 대기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말이다.

 

15세 소녀 마야는 비극을 딛고, 더 이상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 베어타운 전체를 상대로 힘든 싸움을 시작한다. 문제는 소녀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상상을 초월하는 무지막지한 따돌림과 마타도어가 벌어진다는 점이다. 당장 하키팀의 단장인 아버지 페테르는 자신의 일자리부터 걱정해야 할 처지다. 자신들의 우상이 된 아이스하키팀을 지키기 위해, 사건의 진실을 왜곡하고 호도하는 베어타운의 비겁한 곰들의 모습에서 4년 전 참담한 사건의 진실을 가리기 위해 전력투구했던 우리네 언론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울러 현재진행형인 미투운동에 대한 단상도 떠올랐다. 왜 모두가 그 순간만 넘기면 될 거라는 단순한 발상에서 거짓을 끊임없이 생산해 내는 걸까? 거짓으로 가리기 위해선 또다른 거짓말을 동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가해자들은 모르는 것일까? 난 그들의 치졸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피해자들에게 진심을 담아 사과하는 것이 문제해결이 시발점이라는 것을 그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케빈이 자신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미련한 곰돌이 타운의 사람들의 응원에 힘입어 당당하게 마을을 활보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비극의 시작인 것을 절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케빈과 더불어 베어타운 하키팀을 특별하게 만든 벤이(벤야민)의 성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는 또 어떤가. 그 누구보다 남성성이 강조되는 하키 선수가 게이라니! 그래서 소설 막판에 벤이를 마치 자신의 아들처럼 대했던 다비드가 그 사실을 알고는 수치와 배신감에 치를 떨게 되었던 걸까? 이해와 용서 대신 어려서부터 주입된 성적 정체성에 대한 편견이 드러나는 장면도 소설 <베어타운>에서 빼놓으면 안될 요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케빈의 성폭행 사건 이후 자각해서 성공만이 유일한 삶의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몰락할 지도 모를 베어타운 하키팀을 후원하겠다고 나선 프락의 경우는 또 어떤가. 잘못된 것을 자각하고, 행동에 나서지 않는 것 만큼 부끄러운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자신의 자식에게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야말로 오늘날의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사족 같지만 베어타운 사람들에게 선지자처럼 행동하는 펠센의 주인장 라모나에게서는 오베의 향기가 났다.

 

배크만 작가는 <베어타운>에 나온 캐릭터들의 후속담을 그린 시퀄을 이미 완성했다고 한다. 역시 영화화 되기에 적절한 요소를 갖춘 <베어타운> 역시 영화화가 결정되었다는 뉴스로 따라 붙는다. 이렇게 멋진 캐릭터들을 일회용으로 쓰기엔 너무 아깝지 않은가. 베어타운 삼부작 정도는 되어야 하는게 아닐까. 그리고 영화는 제발 너무 할리우드 스타일로 만들지 말고, 북구 스타일로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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