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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비소리 - 조선의 거상 신화 김만덕
이성길 지음 / 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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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숨비소리'--좀녀(해녀)들이 물질할 때 깊은 바다속에서 해산물을 캐다가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물밖으로 나오면서 내뿜는 휘파람 소리 

소설 <숨비소리>의 재목에 대한 국어사전적 뜻풀이다. 해녀들이 단순히 숨을 참는다는 것은 육체적 고통만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니들이 책임져야 했던 가족의 삶, 그니들이 짊어져야 했던 고통스런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러 나오는 한숨 소리였을테다. 

거상 김만덕...이즈음 TV의 드라마로, 그리고 몇 종의 책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이름이다. 소설은 동일한 그니를 다루고 있다. 내용이야 이미 관심 가진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것이기에 양친을 잃고 한때 관기의 몸이 되기도 했지만 거상의 꿈을 품고 결국에는 부를 축적하지만, 정도를 지켜 제주인과 내외의 상인들에게 철저한 신용을 지키고 급기야 헐벗은 제주도민의 구휼에 나서는 참으로 인간미 넘치며 배포당당한 여인으로 생을 이어간다는 내용의 줄거리를 여기서 새삼 구구하게 들먹일 필요는 없을 듯 싶다.  

이야기는 김만덕의 일대기를 길지 않는 분량으로 압축하여 들려준다. 작가는 스스로 제주사람이라 밝히며 제주에 대한 사랑을 담아 김만덕을 조명한다. 디테일에서는 부족한 점이 많다. 다시 말하면 전기가 아니라 소설일진대, 좀은 상황과 사건에 대한 치밀한 묘사와 작가적 상상력을 보탰으면 좋았으리라 싶다. 

짧은 분량으로 거칠게 김만덕의 생을 조감하다보니 매번 작가가 그 옛날 무성영화 시절 변사처럼 상황을 요약 정리하여 제시하는 무미건조함도 자주 드러나 소설읽기의 긴장감과 재미를 반감시키고 있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어쩌면 시험을 앞둔 수험생이 속성의 요약본으로 공부한 듯한 기분이다. 앞으로 작가의 분발을 기대하기로 하고.... 

다만, 김만덕의 생애에 우리가 관심 가지고 애착을 지니는 것이 제대로 이룬 부를 제대로 쓰는 이들에 대한 존경의 심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작금의 이 땅 우리 현실에서 그런 '존경받는 부자, 상인, 기업인'이 드물다는 아픔을 곱씹게 만드는 기회가 되었다는 고마움은 분명히 있다. 

우리는 지금, '만덕 할망'을 기대하고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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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김없이, 남김없이>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숨김없이 남김없이
김태용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소설이 소설을 말하다. 언어가 언어를 말하다 

김태용의 소설은 소설을 실험하고 언어를 실험한다. 독자의 흥미를 끌고 눈을 확 잡아끄는 특별한 사건이 없다. 그의 말을 빌린다면 '서사'가 별로, 아니 사실상 거의 없다. 그런데, 작가는 그렇게 진행되는 작법에도 당연히 서사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숨김없이 남김없이>를 차분히 읽다 보면 그 말이 사실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채게 된다. 

소설 <숨김없이 남김없이>에 대한 리뷰 혹은 독후감을 작성하는 일에 본문을 인용하기 시작하면 아마도 소설을 거의 그대로 옮겨야 할 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작품에 대한 인용으로 일관하는 리뷰는 되려 소설베끼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만큼 이 소설은 서사에 대한 이야기거리가 아니라 소설이 무엇인가, 무엇일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거리로 넘쳐나고 있다. 

우선 작가는 말꼬리 이어가기를 실험한다. 소설은 아주 작은 '서사'(전통적 의미에서라기보다는 실험적 의미에서의 서사)가 담겨 있는 단락 하나 하나를 바꾸는 경우에만 줄 바꾸기를 할 뿐, 한 단락 내에서는 전혀 행을 바꾸지 않고 이어간다. 쉼표와 마침표만 존재하고 나먼지의 문장부호는 찾아보기 힘들다.  책을 펼쳐들고 읽어나가는 일은 마치 크고 작은 한 덩이의 고기 조각을 보는 듯도 하고, 한 웅큼의 종이뭉치를 집어드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당연히 일련의 의식의 흐름을 독자가 쉼없이 따라오도록 만든다. 어느 순간에는 호흡이 느리기도 하고, 또 다른 순간에는 수십의 계단을 오르는 것 같이 휴~하고 한숨을 내쉬어야 할 만큼 숨이 가쁘기도 하다. 그런데도 도무지 쉴 틈이 없다. 이어지는 문장을 따라가지 않고는 작가의, 혹은 작품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 모든 이해작업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말이, 표현된 문자가 끝말잇기처럼 연이어 지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자 표현 실험도 있다. 마치 클립을 이어가듯 작가는 동일한 진술을 반복, 점층(?)으로 이어간다. 모식적으로 나타내면 1, 1+2, 1+2+3, 1+2+3+4,...1+2+3+4+.....7+8....이런 방식이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앞문장에 더 보태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뒤의 .....+7+8 부분을 지워버리기도 하고 중간 부분인 ...4+5..를 뭉텅 빼버리기도 하면서 동일한 진술을 많게는 10회 이상 반복한다. 그런데 그 실험은 우리로 하여금 기억에 대한 반복과 의미더함을, 혹은 망각 혹은 의미축소를 경험하게 만든다. 매우 특이한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작가는 지시, 인칭대명사로만 거의 모든 등장인물을 제시한다. '그', '그녀'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의 어머니임을 암시하는 늙은 여인만 '그녀'의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와 노파임을 패러디한 '미파'로 불리울 뿐, 대개는 단순 인칭대명사로 일관한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점은 '그'와 '그녀' 둘러싼 자질구레한(하기야 많지도 않기에 잡다한 것은 아니고 몇몇의..) 물건, 혹은 사물들--의자, 책상, 매트리스 등--에 대해서는 통상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점이다. 즉, 배경이 되기도 하고 등장인물들의 행위를 촉발하기도 하는 사물들은 그 본래의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하는 통상의 이름으로 지칭되고 있다. 아마도 작가가 이 사물들에 대해서는 이름 그 자체를 부르면서도 다양한 그'것'들의 역할을 조명하는 게 아닌가 싶다. 

또 있다. 어쩌면 이것이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일 수도 있는데, 소설이 소설 아닌 장르되기 , 혹은 다른 장르를 차용한 소설작법을 실험하고 있다. 물론 작가는 '소설'의 장르적 특성 자체를 부인하거나 문학의 장르적 구분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왜 소설이 '그냥 소설'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묻는 작업을 하고 있음이다. 단순히 표현기법으로서의 시, 혹은 아포리즘 첨가가 아니라 '시적 소설되기' 소설적 시되기'라 이름 지을 수 있는 기법을 여러가지로 실험, 시도해보는 것이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김태용의 <숨김없이 남김없이>는 구성상 순서로 마지막 장을 '끝장'으로 매김하고, 여타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마무리하면서 '끝'이라는 글자를 일부러 붙여놓기까지 했지만, 이는  새로운 체세포분열, 혹은 감수분열을 예감케 하는 반어적 의도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소설은 숨김없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숨김을, 남김없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남김을 우리에게 강하게 암시하고 다음을 기다리게 한다. 그러다보면 도대체 언제쯤에나 다 드러날 지, 다 닳아없어질 지조차도 모를 정도로 우리를 이끌고 다닐게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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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니치 코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보이니치 코드
엔리케 호벤 지음, 유혜경 옮김 / 해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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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다빈치코드> 이후 세계적으로 밀어닥친 이른바 '팩션열풍'은 지금도 여전한 듯 하다. 스페인의 카나리아 제도에 있는 천체물리학연구소의 상임연구원으로서 다양한 기고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저자 엔리케 호벤은 자신의 과학적 전문지식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한 편의 과학팩션을 선보이는, 바로 이 작품, <보이니치코드>이다. 

우리에게 케플러의 법칙으로 잘 알려진 과학사상 위대한 인물인 요하네스 케플러와 그와 비견되는 스승 튀코 브라헤를 둘러싼 천문학적 발견의 내용과 브라헤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 그리고 예수회의 탄생과 발전, 그에 얽힌 종교적 굴곡, 마지막으로 책의 제목으로 등장한 수수께끼의 책 <보이니치 필사본>을 둘러싼 의혹과 탐구 등 사실에 근거한 많은 이야기들이 종횡무진 등장하지만, 결국 저자가 우리에게 던지고자 하는 주된 내용은 해묵은 논쟁인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과 해석이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인 예수회 신부인 액토르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우주학자 존, 그리고 개신교도로서 신에 대한 믿음이 남다른 미모의 멕시코 아가씨 후아나가 문제의 미스터리 고문서인 보이니치 필사본의 해석에 매달리는 가운데 새로운 과학적, 고고학적, 역사적, 종교적 진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케플러와 튀코의 관계, 중세 이래 계속되어온 연금술과 각종 수비학을 비롯한 신비주의에 대한 탐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나열된다. 

전세계적 동호인 그룹이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보이니치 필사본에 내용은 해독이 어려운 상형문자와 각종 그림으로 좀체 그 진실을 드러내지 않는데, 주인공들은 이것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루돌프 2세, 그리고 그의 왕립수학자를 역임한 스승과 제자인 튀코와 케플러에 의해 뭔가 해석의 단초를 찾았으리라 믿으며 탐구를 계속해간다. 또한 케플러가 예수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만큼, 보이니치 필사본에 대한 해석의 실마리를 남긴 후 이를 예수회측에 넘겼고, 예수회는 관련 문서 혹은 필사본의 일부분을 보관해 왔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이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단순히 보이니치 필사본의 해석이라는 진실찾기게임보다는 창조론을 대변하는 미국의 종교적 우익세력에 협조할 의도로 참여한 후아나가 마지막 무렵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죽음을 맞고 후아나를 지원하던 단체와 세력이 액토르 신부에 접근하여 필사본 해석의 중요한 단초들을 내놓으라는 협박을 하는 가운데 사건전개는 일단락을 맞는다. 즉, 보이니치 필사본에 대한 완전한 해석은 여전히 미완인 채로 작품은 종결되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종결부분에 액토르가 바티칸의 천문대에 근무하게 됨을 알리면서 그의 역할이 또다른 케플러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즉, 창조론과 진화론의 오랜 대결 속에서 진실을 찾아나서는 임무를 액토르 신부가 하게 될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너무도 많은 과학지식이 숨가쁘게 등장하는 이 소설은, 그래서 독자들이 자칫 방향을 잃고 헤매게 하는 난삽함도 적지 않다. 더구나 바로 그 점때문에 정작 중요한 주제적 관심사인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결에 대한 해법찾기에는 지면 할애를 제대로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저자는 과학자인만큼 다윈과 오늘날의 신진화론--특히 리차드 도킨스로 대표되는--에 일정 정도 무게를 두고 대화 혹은 논지를 전개하므로써 우리에게 '진실'에 대한 힌트를 주기도 한다.     

과학적 사실과 역사적 진실을 밑그림으로 한 이 소설은 단순한 추리의 흥미가 아니라 소설읽기가 우리의 앎을 넓히는데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웅변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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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침묵의 시간 사계절 1318 문고 61
지크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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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같은 풍광의 발트해 연안 작은 도시, 오가는 이들이 모두 고개 숙이고 웃음띠며 인사할 듯한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비밀스런 짧은 사랑 이야기... 

고등학교 13학년인 크리스티안과 여자 영어선생님인 슈텔라의 알듯 모를 듯한 동화같은 사랑, 그러나 슈텔라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그 사랑은 영원한 침묵의 시간 속에 저장되고 만다. 사실 나이를 따지고 보면 슈텔라 선생이 연상이라는 단순한 사실외에 그들의 애정을 금기시할 수만은 없을 듯 하다. 독일의 교육제도에서 고교 13학년이면 거의 미성년의 티를 벗어던진 정신적 육체적 나이라 할 수 있기에, 이들의 사랑을 두고 사안시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할 듯 하다. 

<침묵의 시간>은 전체적인 분량에서도, 내용구성에서도 한 편의 掌篇에 불과하고 그만큼 우여곡절의 위기나 갈등구조도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순식간에 벌어진 둘의 애정과 역시 순식간에 벌어진 슈텔라 선생의 죽음으로 인한 마감, 그렇게 우리를 아침햇살에 사라지는 안개속에 잠깐 머문 듯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몽환 속에서 그들의 자그마한 사랑길을 쫓다 보니 어느새 종착역에 이르고 말았던 것 같다. 그래도 '사랑'이라 이름붙은 모든 행위는 아름답다는 인간 보편의 정서에 울림을 남긴다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 그래서 아련한 느낌에 젖을 수밖에 없긴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세계적인 문호의 작품이라는 명성과는 달리 두 주인공인 크리스티안과 슈텔라의 샘물같은 사랑의 감정과 열정의 폭발에 필연성을 쉽게 찾아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둘이 왜 그리도 갑작스레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독자는 멍멍한 기분을 지닐 수도 있겠다. '옥에 티'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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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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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그는 결코 목청을 높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어떤 외침보다도 강렬한 감동과 생의 진리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는 참으로 '큰 작가'이고, 이 작품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는 '큰 문학' 이다. 

그저 잔잔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소설 전편을 통해 그는 흥분하거나 분노하거나 지나치게 감상에 젖지도 않는다. 다만, 담담하게 30년의 시공을 뛰어넘는 생의 얽힌 이야기들을 조용조용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리고는 우리를 성찰 속으로 몰아가고 회한에 젖게 만든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겐자부로는 그의 문학인생 50년을 결산하는 작품으로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우리에게 선사했는데, 작가 자신이 화자로 등장하여 주요 인물들의 인생 역정, 그리고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빚어진 일련의 민중봉기, 태평양전쟁과 패전, 연합군인 미군 점령과 그에 따른 비극,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성찰, 지적 장애인인 아들과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익히 알고 있듯이 '애너벨 리(Annabel Lee)'는 우리에게 <마지막 잎새>라는 단편소설 및 추리소설의 원조격으로 널리 알려진 에드가 알란 포우(Edgar Allan Poe)가 쓴 장편시의 제목이자 주인공 이름이다. 포우의 이 시는 가장 뛰어난 연애시 중 하나로 평가받는 포우의 대표작이며, 죽은 여인과의 사랑을 환상적이고 동화적인 배경에서 아름답게 묘사하여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겐자부로는 열일곱 고교시절에 번역본으로 읽은 포우의 이 시에 깊이 심취하는 것은 물론, 지역의 미국문화원에서 접한 영상물로서의 '애너벨'에 깊은 기억의 편린을 갖게 된다. 그런데 그 영상물에 등장하는 어린 소녀가 바로 소설의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쿠라인 것이다. 사쿠라는 어린 시절 '전쟁 상흔'과 미군에 의한 '능욕 당함'의 와중에서 촬영한 영상물의 주인공이며, 자신을 능욕한 미군에 의해 '사육'당하고 급기야는 그와 결혼하는 한편 미국과 멕시코, 스페인 등지에서 여러편의 영화에 동양적 이미지의 배우로 활동한 인물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겐자부로가 평생의 스승인 와타나베 가즈오 교수의 죽음으로 충격받아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느닷없이 찾아 온 대학 동창 고모리 다모쓰의 제안으로 영화작업에 참여하면서 시작된다. 문제의 영화는 중세말엽 제후국 영주들의 핍박에 저항하는 농민봉기를 그린 독일작가  클라이스트 작품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을 기념하는 세계적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아시아에서의 작업을 위한 것이었다. 이름하여 '미하엘 콜하스 계획'이다. 특히 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대목은 이시아판의 작업으로 우리나라의 김지하 시인이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시나리오 작업을 맡기로 하였으나 70년대 중반 김 시인이 독재권력에 의해 투옥되면서 작업의 몫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넘겨져다는 부분이다. 사실 겐자부로는 당시 김 시인의 석방을 촉구하는 일본 지식인의 항의대열에 참여한 '실천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뚜렷이 보여 준 바 있고 이 소설에 그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고모리의 제안, 주연배우로 참여하게 된 사쿠라의 귀국, 그리고 겐자부로의 시나리오 작업이 치밀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100여년 전 겐자부로의 고향 마을과 인근에서 벌어진 일본의 농민봉기가 주요 내용으로 등장하고 일본판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예기치 않은 '아동 포르노' 사건이 터져 결국 영화화 작업은 중도포기에 이른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열일곱 시절에 각인된 영상물 '애너벨 리'의 주인공인 사쿠라와 적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과거의 아픔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그것은 전쟁고아인 사쿠라 개인의 상흔이기도 하지만 일본 현대사의 비극이기도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100여년 전의 농민봉기에서 겪은 선조들의 아픔이고 태평양전쟁통에서 고통스러운 삶의 무게를 지고 자식들을 키워 온 작가 자신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처절한 삶이기도 했다는 것을 무리없이 보여준다. 겐자부로가 그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촘촘하게 이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과정에서 영화 시나리오가 문학작품으로, 그리고 문학적 영감이 영화의 한 장면으로 중첩되어 그려지는데, 그는 이를 두고 '새로운 형식'의 실험이라 말하기도 한다.               

우연찮은 암초를 만나 결국 영화작업은 중도포기되고 말았는데, 이제 소설은 그로부터 30년후로 건너 간다. 일흔의 나이를 훌쩍 넘겨 겐자부로는 중년의 나이에 이른 지적 장애인 아들 히카리와 매일 늦은 오후 산책을 즐기며 인생을 관조하는데, 암투병으로 지친 몰골의 친구 고모리가 다시 그를 찾는다. 30년 전의 그 영화화 작업의 마무리를 부탁하면서..... 

30년만의 해후에서 이제 생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친구 고모리는 사쿠라의 부탁이라면서 새로운 각도에서 영화에 마침표를 찍자고 제의하는데, 그 내용은 예전의 그 '분기탱천' 혹은 '열혈남아'적인 것이 아니라 사쿠라, 혹은 '영원한 애너벨 리'의 아름다운 화해와 관조의 것이었다. 작가 자신도 그들 두 사람의 의도와 시도가 이미 인생에서 터득한 자신만의 진리와 다름없음을 느끼고 흔쾌히 동참한다. 지난 30년간 고모리는 정신병원을 들락이는 사쿠라를 곁에서 돌보며 인생의 이면을 들여다 보았고, 사쿠라는 어린 소녀 시절에 겪은 지울 수 없었던 아픔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를 넘어서는 정신적 평화를 얻었으며, 작가는 아웅다웅 애면글면 파란곡절의 인생살이라는 것이 결국은 늘 그 자리에 있는 삶 그 자체일 뿐이라는 사소하지만 위대한 성찰에 이른 것이다.      

사쿠라는 100여년 전의 농민봉기 당시에 여성으로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여 민중의 애환을 같이 나눈 '메이스케 어머니'의 '넋두리'(우리식으로 하자면 일종의 한맺힌 무녀의 '푸닥거리'일 수 있지 않나 싶다)를 일인唱으로 노래하고, 작가 고향 마을의 수 백, 수 천의 아녀자들이 후렴구를 합창하는 일대 장관을 연출하는 야외공연 자체를 영화로 만들면서 소설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런 가운데서 작가 겐자부로는 역사적 시공을 넘나들고 거친 삶이 가져다 준 외상과 극복을 위한 내면의 갈등이 어떻게 정반합의 변증법적 조화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주며, 그저 생은 '여기 이 자리'에 늘 있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별빛'에 견주어 그려낸다. 마치 조지훈이 <승무>에서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하듯이. 

겐자부로의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는 그리하여 애너벨 리가 결코 '싸늘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되려 '아름다이 살다'가 되는 것임을 작가는 반어적으로 보여준다. 소설 후반부에 자주 등장하는 사쿠라의 읊조림인 "It's only movies, but movies it is!"는 아마도 작가가 굳이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결국엔 " It's only lives, but lives it is!"일 것이리라.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참으로 감동스러운 소설읽기의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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