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에 겐자부로, 그는 결코 목청을 높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어떤 외침보다도 강렬한 감동과 생의 진리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는 참으로 '큰 작가'이고, 이 작품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는 '큰 문학' 이다. 

그저 잔잔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소설 전편을 통해 그는 흥분하거나 분노하거나 지나치게 감상에 젖지도 않는다. 다만, 담담하게 30년의 시공을 뛰어넘는 생의 얽힌 이야기들을 조용조용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리고는 우리를 성찰 속으로 몰아가고 회한에 젖게 만든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겐자부로는 그의 문학인생 50년을 결산하는 작품으로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우리에게 선사했는데, 작가 자신이 화자로 등장하여 주요 인물들의 인생 역정, 그리고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빚어진 일련의 민중봉기, 태평양전쟁과 패전, 연합군인 미군 점령과 그에 따른 비극,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성찰, 지적 장애인인 아들과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익히 알고 있듯이 '애너벨 리(Annabel Lee)'는 우리에게 <마지막 잎새>라는 단편소설 및 추리소설의 원조격으로 널리 알려진 에드가 알란 포우(Edgar Allan Poe)가 쓴 장편시의 제목이자 주인공 이름이다. 포우의 이 시는 가장 뛰어난 연애시 중 하나로 평가받는 포우의 대표작이며, 죽은 여인과의 사랑을 환상적이고 동화적인 배경에서 아름답게 묘사하여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겐자부로는 열일곱 고교시절에 번역본으로 읽은 포우의 이 시에 깊이 심취하는 것은 물론, 지역의 미국문화원에서 접한 영상물로서의 '애너벨'에 깊은 기억의 편린을 갖게 된다. 그런데 그 영상물에 등장하는 어린 소녀가 바로 소설의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쿠라인 것이다. 사쿠라는 어린 시절 '전쟁 상흔'과 미군에 의한 '능욕 당함'의 와중에서 촬영한 영상물의 주인공이며, 자신을 능욕한 미군에 의해 '사육'당하고 급기야는 그와 결혼하는 한편 미국과 멕시코, 스페인 등지에서 여러편의 영화에 동양적 이미지의 배우로 활동한 인물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겐자부로가 평생의 스승인 와타나베 가즈오 교수의 죽음으로 충격받아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느닷없이 찾아 온 대학 동창 고모리 다모쓰의 제안으로 영화작업에 참여하면서 시작된다. 문제의 영화는 중세말엽 제후국 영주들의 핍박에 저항하는 농민봉기를 그린 독일작가  클라이스트 작품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을 기념하는 세계적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아시아에서의 작업을 위한 것이었다. 이름하여 '미하엘 콜하스 계획'이다. 특히 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대목은 이시아판의 작업으로 우리나라의 김지하 시인이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시나리오 작업을 맡기로 하였으나 70년대 중반 김 시인이 독재권력에 의해 투옥되면서 작업의 몫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넘겨져다는 부분이다. 사실 겐자부로는 당시 김 시인의 석방을 촉구하는 일본 지식인의 항의대열에 참여한 '실천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뚜렷이 보여 준 바 있고 이 소설에 그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고모리의 제안, 주연배우로 참여하게 된 사쿠라의 귀국, 그리고 겐자부로의 시나리오 작업이 치밀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100여년 전 겐자부로의 고향 마을과 인근에서 벌어진 일본의 농민봉기가 주요 내용으로 등장하고 일본판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예기치 않은 '아동 포르노' 사건이 터져 결국 영화화 작업은 중도포기에 이른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열일곱 시절에 각인된 영상물 '애너벨 리'의 주인공인 사쿠라와 적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과거의 아픔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그것은 전쟁고아인 사쿠라 개인의 상흔이기도 하지만 일본 현대사의 비극이기도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100여년 전의 농민봉기에서 겪은 선조들의 아픔이고 태평양전쟁통에서 고통스러운 삶의 무게를 지고 자식들을 키워 온 작가 자신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처절한 삶이기도 했다는 것을 무리없이 보여준다. 겐자부로가 그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촘촘하게 이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과정에서 영화 시나리오가 문학작품으로, 그리고 문학적 영감이 영화의 한 장면으로 중첩되어 그려지는데, 그는 이를 두고 '새로운 형식'의 실험이라 말하기도 한다.               

우연찮은 암초를 만나 결국 영화작업은 중도포기되고 말았는데, 이제 소설은 그로부터 30년후로 건너 간다. 일흔의 나이를 훌쩍 넘겨 겐자부로는 중년의 나이에 이른 지적 장애인 아들 히카리와 매일 늦은 오후 산책을 즐기며 인생을 관조하는데, 암투병으로 지친 몰골의 친구 고모리가 다시 그를 찾는다. 30년 전의 그 영화화 작업의 마무리를 부탁하면서..... 

30년만의 해후에서 이제 생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친구 고모리는 사쿠라의 부탁이라면서 새로운 각도에서 영화에 마침표를 찍자고 제의하는데, 그 내용은 예전의 그 '분기탱천' 혹은 '열혈남아'적인 것이 아니라 사쿠라, 혹은 '영원한 애너벨 리'의 아름다운 화해와 관조의 것이었다. 작가 자신도 그들 두 사람의 의도와 시도가 이미 인생에서 터득한 자신만의 진리와 다름없음을 느끼고 흔쾌히 동참한다. 지난 30년간 고모리는 정신병원을 들락이는 사쿠라를 곁에서 돌보며 인생의 이면을 들여다 보았고, 사쿠라는 어린 소녀 시절에 겪은 지울 수 없었던 아픔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를 넘어서는 정신적 평화를 얻었으며, 작가는 아웅다웅 애면글면 파란곡절의 인생살이라는 것이 결국은 늘 그 자리에 있는 삶 그 자체일 뿐이라는 사소하지만 위대한 성찰에 이른 것이다.      

사쿠라는 100여년 전의 농민봉기 당시에 여성으로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여 민중의 애환을 같이 나눈 '메이스케 어머니'의 '넋두리'(우리식으로 하자면 일종의 한맺힌 무녀의 '푸닥거리'일 수 있지 않나 싶다)를 일인唱으로 노래하고, 작가 고향 마을의 수 백, 수 천의 아녀자들이 후렴구를 합창하는 일대 장관을 연출하는 야외공연 자체를 영화로 만들면서 소설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런 가운데서 작가 겐자부로는 역사적 시공을 넘나들고 거친 삶이 가져다 준 외상과 극복을 위한 내면의 갈등이 어떻게 정반합의 변증법적 조화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주며, 그저 생은 '여기 이 자리'에 늘 있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별빛'에 견주어 그려낸다. 마치 조지훈이 <승무>에서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하듯이. 

겐자부로의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는 그리하여 애너벨 리가 결코 '싸늘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되려 '아름다이 살다'가 되는 것임을 작가는 반어적으로 보여준다. 소설 후반부에 자주 등장하는 사쿠라의 읊조림인 "It's only movies, but movies it is!"는 아마도 작가가 굳이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결국엔 " It's only lives, but lives it is!"일 것이리라.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참으로 감동스러운 소설읽기의 기쁨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