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 노희경 원작소설
노희경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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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고금을,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에게는 영원히 화두일 수밖에 없는 몇가지 주제, 혹은 주된 명제들이 있다. 삶과 죽음, 인간에 대한 이해, 사랑...이런 것들이 아니겠는가? 그 범주에 속하는 것 중에 바로 '어머니'가 있을 것이다. 

인기 TV드라마 작가인 노희경의 드라마 대본을 소설화 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읽은 다음 나는 제주엘 다녀왔다. 나의 어머니가 살고 계신 곳이다. 지금 어머니께서는 치매라는 안타까운 노년의 굴레 초기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계시다. 아직 가족들을 비통케할만큼 증상이 심하지는 않지만 잠깐씩 기억의 단초를 놓치는 상황에 놓여 계시다. 음식 솜씨 좋으시고 세상의 이웃들에게 뭐든 나누길 좋아하시던 어머니, 문학소녀마냥 대학노트의 빈칸을 한 줄 한 줄 메꾸어 나가시며 일기도 쓰시던 어머니, 모든 어머니께서 그러시듯 자식들에겐 한없는 사랑과 염려의 끈을 놓지 않으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께서 자신 스스로 정신줄을 깜빡 놓는다는 사실을 간간이 인식하시면서 못내 안쓰러워 하고 계신다. 믿을 수 없다. 나의 어머니는 그 인생의 고비를, 그 안타까운 증세를 비껴 가실 줄 알았다. 

두어 달에 한번씩 찾아뵐 때면 나는 어린애처럼 변하시는 어머니께 남자인 내 손으로 식사 한끼라도 만들어 드리려고 노력한다. 물론 누이네가 아파트 같은 단지내에 거주하는 연유로 뭐 하나 소홀하지 않게 극진히 돌봐 드리고 있기에 어머니의 생활 자체는 크게 불편한 것이 없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을 알기도, 모르기도 하신 듯하다. 며칠간 아주 정상적인 언행을 하시다가도 또 급작스레 뭔가 정신의 회로가 망가지는 경우가 있다. 그 어머니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를 늘 깊이 생각한다. 밥 한끼 지어드리는 것은 아주 작은 나의 마음에 불과하다. 그토록 좋아하시는 큰 아들과 단 둘이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 분은 세상에 부러울 것 없으리라는 걸 나는 느낀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어느 정도 연륜에 도달하면 이심전심으로 느끼는 게 분명 많아진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100분 정도의 분량으로 만들면 마침 맞을 만한 드라마용 소설이다.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다. 깊은 치매 증상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월급장이 의사 남편, 그리고 장성한 아들 딸 둔 '어머니'가 갑자기 암 말기의 진단을 받게 되고 수술마저 불가능한 단기의 시한부 삶을 살면서 가족들과 마지막을 나누는 이야기이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눈물을 주루룩 흘리게 만든다.  

엄밀하게 말하면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가? 살면서 영화, 드라마, 소설, 그리고 '인간극장'류의 실화 등에서 숱하게 보고 들은 이야기 중 하나다. 그래서 뭔가 새로운 평이나 말을 보탤 것도 없다. 굳이 몇 마디를 한다면, 아무리 같은 내용이지만 '어머니'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에게 또 '새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표 이야기'는 무궁무진한 것이리라는 우리의 깨달음이다. 

아깝지 않은 눈물, 마음을 아리게 만드는 상황들....그런 감정 순화, 그런 '어머니 생각' 만으로도 이 소설은 제값을 한다. 그래서 나는 소설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의 어머니께 간곡하게 말씀드리고자 한다.  

"어머니, 어머니, 나의 어머니, 부디 지금 이대로라도 오래오래 제곁에 계셔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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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싱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싱커 (반양장) - 제3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29
배미주 지음 / 창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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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배트맨> 시리즈, 그리고 근육질의 아놀드 슈왈제네거나 실베스터 스탤론 같은 헐리우드 액션 스타들이 주로 등장하는  미래도시형 SF영화를 두루 모아 놓은 듯한 청소년소설 <싱커>는 컴퓨터 게임 영상을 보는듯 그저 흘러간다. 한반도의 지하에 세워진 미래도시 시안(도시 이름의 첫 자모인 'ㅅ'과 'ㅇ'은 '서울'의 자모를 차용한 일종의 패러디이리라)과 도시 중심부에서 밀려난 난민촌 메이징 타운 그리고 폐쇄된 인공자연 신아마존을 배경으로 하여 벌어지는 청소년들의 서기 2168년의 모험이야기가 담겨 있다. 

철저히 계획되고 통제된 그리고 첨단의 시설물과 장치들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제공하는 시안의 의 삶은 그 중심지인 파에타광장을 중심으로 영위되고 있고 오늘 우리 사회의 휘황한 네온불빛과 물질적 풍요를 상징하고 있음이다. 그리고이와 대비되어 묘사되는 이른바 각성제 등이 밀거래되는 난민촌인 메이징타운은 100년전 과거 구시대에 전자제품 유통 중심지였다고 한다. 이 설정은 나중에 시안의 수비대가 물리력을 동반한 진압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상세히 묘사되는 바처럼 아마도 지난해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준 '용산참사'를 기억나게 한다. 번영과 물질적 풍요를 대변하는 고층빌딩군을 만들기 위해 서민의 삶을 화염과 군홧발로 짓밟은 용산재개발 현장, 그곳은 전자상가로 유명하지 않은가? 신아마존 역시 그 존재위치가 동강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는 석회동굴군으로 유명한 영월 일대의 자연과 댐 건설 및 보존을 둘러싼 논란의 대표적 장소로 선택된 듯 싶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초국적 제약회사인 바이오옥토퍼스(이 명칭 역시 장수유전자라는 첨단기술을 상징하는 'Bio'에다가  다국적, 초국적이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Octopus' 즉 '문어발 경영'을 암시하는 그 '문어' 혹은 '유해한 세력을 떨치는 조직'이라는 단어를 조합하여 만들어졌다)가 지배하는 지하도시 시안에서 무미건조한 일상을 살아가던 마미, 그리고 다흡, 부건 같은 청소년들이 메이징타운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연하게 각성의 기회를 갖게 되고 이를 통해 단순한 버츄얼 게임이 아닌 싱크(sync, synch)게임에 접속하면서 다양한 경험과 새로운 사실을 깨우치게 된다. 이 게임은 급기야 은밀하게 청소년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되면서 Syncher들이 급증하고 이들은 동호회 활동을 전개한다. 그런 와중에서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은 부건이 뛰어난 컴실력과 추리력으로 시안이라는 도시는 음모와 억압의 세력들이 자신의 기득권과 이익유지를 위해 철저히 통제하고 일반 시민들을 단순한 체제순응자로 만들고 있음을 밝혀 나간다.  

한편, 마미 일행은 메이징타운에서 비시민인 쿠게오 등과 접촉하는 동시에 싱커게임을 통한 반려수(자신의 의식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조류, 포유류 등 동물의 신체로 변이되어 그 동물의 의식체계까지 동시에 경험하게 되는 바로 '그 동물'을 말한다. 일종의 살아 움직이는 '아바타'이다) 활동 등을 하는 과정에서 부건의 이복형제이자 공동의 아버지인 장현수 박사와 그의 부인이었던 어머니가 연구하던 역진화 발생기를 완성한 칸을 만나게 된다. 이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인 '칸'의 이름도 그가 몽골계의 유려한 몸매와 인상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면서 칭기즈 '칸(Khan)'을 연상시킨다. 

마미와 부건 등 주인공 청소년들은 바이오옥토퍼스와 파에타 회장 일당의 음모와 살인 등을 밝혀나가는 동시에 빙하기에서 점차 해빙기로 접어드는 지상의 세계를 소망하게 되는데, 급기야 시안 지배세력의 충실한 하수인들인 정보기관원들 즉 'Men in Black'들에게 활동이 포착되게 되고 체포되어 심문을 받는 등 곡절을 겪으면서 해방을 꿈꾸게 된다. 그러나 시안의 지배세력 또한 만만치는 않을터 급기야 메이징타운에 대한 대대적 진압 소탕 작전이 전개되고 메이징타운 폐허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때 칸이 재생한 곰쥐떼가 시안에 까지 나타나 시안의 모든 생활을 제어하는 스마트시스템을 작동불능상태로 만들면서 결국 파에타 회장은 파멸하여 죽게 되면서 인공도시의 운명은 몰락 직전에 놓이게 된다. 결국 이들은 알지도 느껴보지도 못한 지상세계에서의 새로운 생활, 생존 가능성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칸의 권유에 따라 지상생활을 결심하고 태양이 비치는 얼음바닥으로 올라간다. '도전을 기다리는 세계'로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늦둥이'로 지칭된다. 시안의 주류세계에서 괄시받고 모욕당하며 그저 한낱 부품 정도로만 취급당하는 철저한 비주류인 셈이다. 오늘의 용어로 하자면 '지진아' 혹은 '열등생' 인 것이다. 한마디로 '문제아들의 반란'이 이야기의 주된 요소이다. 그들이 앞장서 단합하고 대결하여 체제전복까지 만들어 낸다. 그 와중에 탕쯔칭 패거리라는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 부자이자 권력자의 자식들과의 한 판 대결도 들어있고 싱커들의 신아마존에서의 흥미로운 경험도 영화처럼 펼쳐진다. 당연히 변화를 열망하고 '인간다운 삶'과 '자연과 동화된 삶'을 염원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지배세력과의 투쟁이 묘사되면서 촛불시위를 연상시키는 장면도 등장한다. 소설 그대로 한 편의 한국형 SF영화를 만들면 청소년들이 신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이야기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리처드 도킨스를 대표로 하는 현대적 진화론을 소개하기도 하고 구시대와 신개념을 넘나드는 과학적, 첨단기술적 지식을 군데군데 소개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현세인류의 원조인 구석기 크로마뇽인들과 그들이 만들어 놓은 알타미라 동굴벽화도 제시하면서 원시공동체의 삶에 대한 강렬한 희구를 표현한다. 이는 싱커들이 일종의 동류의식 표현으로 사용하는 상징체계인 물고기 그림으로 구체적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초기 기독교도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지하 카타콤에서의 생활을 하는 가운데 흙바닥에 물고기 형상을 그려 소통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 실체를 드러낸다. 열대우림을 상징하는 명칭인 인공자연 신아마존의 설정도 이런 작가의 의도를 더욱 선명하게 한다. 

이 소설은 지금의 청소년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요소를 망라하고 있다. 그들이 통쾌하게 박수치며 '동조'할 수 있겠다. 특히 성적에만 매달리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과 불만으로 보자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소설에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처음 반려수와 일심동체는 불가능할 듯 혼란을 느끼던 주인공들이 갑자기 자유자재로 의식의 혼연일체까지를 너무 쉽게 성취하는 것도 필연성이 부족해 보이고 더 큰 문제는 전체적으로 주인공들이 왜 갑자기 각성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는지에 대해 어리둥절하게 된다. 또한 싱커로서의 모험담은 영화의 장면처럼 구체적이고 길게 서술되는 반면에 나중의 투쟁, 특히 칸의 결단 혹은 곰쥐떼의 시안 습격 등은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나는 사건이며 승리 또한 쉽게 얻어내는 과정은 좀 맥이 빠진다. 그토록 첨단의 기술을 자랑하는 지배세력이 제대로 힘도 한번 발휘하지 못하고 허물어져 버리는 장면들은 시시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첨단과학기술혁명의 미래가 과연 인간에게 안락하고 편안한 삶, 오래 살고 풍요로운 삶만을 가져다 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미래예측의 공통적인 염려를 청소년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관심사로 압축한 가운데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오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갈등에 대해서도 알레고리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이 왜 권위있는 창비의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청소년들이 잠시 컴퓨터 게임을 멈추고 이 소설을 한번 읽어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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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유어 마인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Open Your Mind 오픈 유어 마인드 -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행복명언
이화승 엮음 / 빅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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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가한 지하철역 구내에서 오지 않는 열차를 기다리는 사이, 문득 한족 벽면에 붙어있는 아름다운 글귀를 접하는 경우가 있다. 짧은 경구들 속에 담긴 뜻을 알아채고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게 된다. 뭉클하는 작은 소용돌이가 마음 저 밑에서 솟구치기도 한다. 고운 이야기, 감동의 한 귀절을 읽다보면 어느새 마음은 차분해지고 뭔가의 새로움을 느끼게 되는 경험을 자주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일부러 찾지 않아도 좋은 글, 마음을 흔드는 명언들이 주변에, 도처에 널려있다. 우선 광화문 한복판의 그 웅장한 보험회사 건물 벽면에 붙어있는 대형 현수막의 글귀만 해도 그렇다.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혹은 주려는 귀한 말씀이 곳곳에서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있다. 사실 성인을 비롯하여 위대한 종교적, 철학적, 예술적 인물들이 남긴 촌철살인의 그 한마디가 결국은 고리에 고리가 연이어 이어지듯 순환을 되풀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 해석이 다양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모두가 다 옳고 바른 듯 보이기도 하지만 정반대의 경우 또한 '사실'일 수 있다는 것에 적잖이 당황할 때도 많다. 굳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명언 경구를 수많이 접하다보면 '침묵'만이 '금'은 아니요, '다변' 또한 '금강석'처럼 절실할 때도 있는 법이다. 삶이란 결국 다양한 조건 속에서 최선의 선택이 연속되는 것이기에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상반된 가르침들이 경우에 따라 공통적으로 용인되는 사례가 허더할지라도 결국에는 원칙적인 善, 美, 외형보다는 내면, 육체적 욕망보다는 정신적 성숙, 비난과 갈등보다는 화해와 타협, 빠름보다는 약간의 느림, 쾌락보다는 평안한 만족 등등에 대해서는 누구나 인정하고 수긍할 수밖에 없을듯 싶다. 

동양, 특히 일본(아마도 편자가 참고한 원저작의 주요 부분들이 日本서적인 것 같다)불교의 묵상전통, 일본불교인 일련교 고승들의 말씀을 주로하여 편집된 책 <OPEN YOUR MIND>도 이런 전통에 따른 '명언집'이다. 순간에 얻는 귀한 감동을 한꺼번에 뭉치로 담아주는 이런 책들은 우선은 고맙다. 반성의 기회를 곱배기로 안겨주기 때문이다. 버리지 못하는 아집, 떨쳐내지 못하는 욕망의 찌꺼기, 가라앉지 않는 분노나 애증의 감정들을 차곡차곡 눌러 주저앉게 만들려면 최소한 이렇게 거듭 강조되는 '말씀의 폭탄 세례'를 받는 것도 유익한 체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마운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하다. 어쩌면 300쪽 가까운 그 내용들에 주눅들어 소화불량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염려때문이다. 해결할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마치 소설읽기처럼 앞표지부터 내리 다 읽지 말고 띄엄띄엄, 생각날 때마다 펼쳐서 몇 쪽만 감상하고 음미한 후 다시 덮어두는 방법이 해결책의 하나일 수 있겠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방법을 택하기로 하고 어떤 때는 일상의 작은 표정들을 담아놓은 사진만 들여다 보기도 하고, 식상하면 몇편의 경구들을 읽어 보았다. 간혹, 특히 앞 부분에 군데군데 담겨있는 르네상스풍의, 그리고 들라크루와풍의, 모네풍의 그림은 그냥 넘겨버렸다. 로마신화나 성경(구약)의 한 테마를 화폭에 옮겨놓은 그 명화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용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배치때문이었다. 

귀하고 좋은 말씀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리고 제목처럼 '마음을 열라고 하고 나도 열려고 해보았다' 하지만 열렸는가? 전적으로 내 모자람과 성찰의 부족으로 문고리만 잡고 서 있는 형국이다. 당연히 책의 내용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의 닫힘때문이리라' 아마도 두고두고 자주자주 들쳐보면서 작은 들창이라도 열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겠다. 그런 계기를 만들어준 '행복명언'에게 고마운 인사를 드려야겠다. 

구태여 한 마디 보태자. 단일한 저작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원전을 바탕으로 뽑아 만든 '엮음책'이라는 점에서 내용에 일관성은 아무래도 좀 부족한 점이 있음은 차치하고 번역상 매끄럽지 못한 점이 허다하다는 지적을 하고 싶다. 편자의 오역이라기보다는 우리말로 옮김에 있어서의 의미전달에 문제가 생긴다는 점이다. 결정적인 오역은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직역과 의역이 교차하는 가운데 본시 그 경구가 지닌 '맛과 멋'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토를 달고 싶은 것이다. 이런 경구 명언집은 우리말의 매끄러운 맛이 그 묘미를 더 한층 살려줄 수 있기에 반드시 필요한 지적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많은 예를 들 수도 있지만, 엮은이의 노고에 진심으로 존경의 말씀을 드린다는 전제에서 몇개만 나열해보자.  

The pursuit of truth attracts critics.(12쪽) 역자는 '진리추구는 비판자를 끌어들인다'로 하였는데, 한문투의 이런 번역은 의미전달의 깊이를 반감시키지 않겠는가? 특히 영문에서 物主語는 이유, 원인, 조건 등의 부사구 혹은 절로 해석함이 타당하다는 '문법적 지식'도 있지 않은가? 차라리 "진리를 추구하다보면 비판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정도로 의역해도 무방할 듯 싶다. 

When the student is ready, the teacher will appear.(44쪽) '학생들이 준비가 되면 스승이 나타난다'는 번역은 너무 무미건조하다. 그저 "배울 준비만 되면 스승은 나타나게 된다" 정도 좋을듯... .. Make time each day for self-reflection(83쪽)-'날마다 자아반성을 위한 시간을 가져라'는 번역은 우선 '자아'와 '자기'에 대한 혼용도 문제고 그냥 "매일 스스로를 반성하라" 혹은 "매일 자신을 돌아보라" 정도면 어떨까? 

이외도 지나친 한문투와 고답체 문투 때문에 영문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되려 우리말의 옮김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 알듯 모를듯한 부분이 제법 많다. 혹여 역자가 다음 기회에 좀 더 가다듬어 주면 어떨까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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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싱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 서영은 산티아고 순례기
서영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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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그대>의 작가이신 서영은 선생님께 

의례적인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평소에 그리 건강하신 체질은 아니신 듯 보여 이즈음의 선생님 건강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자주 여행을 다니시려면 그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일 듯 싶은데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아무쪼록 잘 챙기시길 부탁드립니다. 

산티아고를 찾은 여행, 그 길에서 만난, 그리고 선생님께서 찾으신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에게 남김없이 보여주시고 들려주셔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참으로 그저 여기 이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선생님 덕분에 저희도 어느새 산티아고엘 동행한 느낌입니다. 거듭 고맙습니다. 

우선 선생님의 이번 산티아고 순례의 여행은, 선생님께서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저는 이하에서는 "걸었다"로 약칭하려 합니다. 물론 선생님께서는 '왜 <화살표>로 약칭하지 않느냐고 못마땅해 하실 수도 있지만, 독자인 저로서는 <걸었다>로 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이 부족한 편지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라는 보고문에서 여러번 강조하여 기록하고 고백하신 것처럼 '버림' '떠남' '새로이 짊어짐'으로 요약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선생님은 물리적인 배낭 속 물건 버리기와 그걸 통한 비움과 얻음, 애증 버리기와 그걸 통한 새로운 사랑 익히기라는 명제를 반복해서 말씀하셨고 충분히 공감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처음 연말의 문학상 심사 에피소드를 소개하시는 부분에서 앞으로의 글의 진행과 펼쳐질 많은 것들에 호기심을 가지고 자세를 곧추세우며 정좌하고 글읽기에 돌입했을 때, 저는 재미삼아 읽는 독서가 아니라 제 영혼에 긴장의 끈을 단단히 조여매고 정독하리라 마음먹었습다. 물론 이런 저의 고백은, 문단의 뒷 이야기, 선생님의 문학적 이력이나 삶의 곡절에서 비롯되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기대했다는 말은 결단코 아닙니다. 설혹 그런 에피소드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선생님의 내면을 드러내는 단순한 배경, 혹은 작은 장치에 불과하리라는 느낌은 처음부터 들었습니다.   

언젠가 저는 예술의 전당에서 '양희은'이라는 가수의 콘서트를 본 적이 있습니다. 듣는 이에 따라 그니의 노래가 좋으냐 아니냐 하는 일반적인 음악평이 아니라, 그저 아무것도 치장하지 않은  단순한 무대, 어쿠스틱한 악기 배열, 청아한 음성, 혼신의 힘을 다하는 가수의 열정, 몰입하는 청중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분위기를 자아냈기에 콘서트장을 빠져 나오며 저 혼자말로 '마치 영혼을 샤워한 느낌'이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선생님의 이번 <걸었다>를 읽기 시작하면서 저는 그런 제 경험이 다시 반복될 것 같은 예감을 지녔더랬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감성과 정신의 울림이라는게 누가 강요하거나 억지로 집어 넣는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느낌과 정서라는게 억지로 가져다 준다고 받고 공감하는 것도 아닐진대, 선생님의 <걸었다>는 걷기도 전에 이미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으니 독서가로서는 얼마나 행운이었겠습니까? 마치 선생님께서 출발도 전에, 아니 순례의 여행을 천착하기도 전에 이미 들떤 마음으로 결정하신 것 처럼요. 

그리하여 "자~ 선생님을 따라 출발해보자"고 하며 시작했습니다. 비행을 하고 베트남의 나이 어린 그 처녀의 아픔과 죽음을 같이 아파하고 그리고 파리의 드골공항에 도착하여 긴 기차여행을 하여 독자인 저도 스페인 어느 한 도시 '이룬'의 출발선에 섰습니다.   

<걸었다>의 88쪽에서 저도 '드디어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걷고 걸었습니다. 며칠을. 100쪽이 넘을 무렵까지 선생님의 발 뒤꿈치를 따르기도 하고, 쓰리고 아픈, 그래서 물집 생겼을 발가락을 걱정하며 따라 걸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습니다. 어느새 선생님은 '기독교' '하나님' '예수' '성서의 어느 구절''성령' '은혜' ....눈에 보이고 피부에 와닿는 모든 것들을 '아멘'(선생님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아멘~ 쿡')하기 시작하시더군요?  그렇습니다. 제말투에서 느꼈셨으리라 짐작하지만, 저는 그때부터 좀 못마땅했습니다.

잠시, 이 부분에서 저도 밝혀두어야겠죠? 저는 막연히 기독교를 폄하하는 사람도 아니고,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적 입장을 지닌 사람도 아닌, 그저 독실한 '무신론자'일 뿐입니다. 물론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서의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 '마흐메트님'을 그 누구보다도 인정하고 존경합니다. (ㅎㅎ 무신론자라 했으니 알만하다..고 나무라시지는 않겠죠?)     

순례의 여행, 혹은 고행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왜 선생님의 <걸었다>에는 이런 딴죽을 걸게 되나를 저도 곰곰 따져 보았습니다.  그건 아마도 선생님을 우리는 여전히 '소설가' '문학예술인'으로 알고 있고 선생님의 글과 작품은 '문학작품의 범주'에 있을 거라는 어떤 선입관으로 바라보고 있기에 그럴거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쉽지 않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고행하신 선생님마저 그 길과 여정을 '순례'로만, '신앙의 길'로만 여기고 모든 풍광과 사람 만남을 그 테두리에서만 보고 관찰하고 평가하고 감사하고 염려하며 '결론짓고' 우리에게 제시하였으니 '종교'의 색깔을 빼고 난 우리는?, 우리는 대체 무얼 얻어야 하죠?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선생님의 종교적 심성과 은혜받음, 믿음의 신실함을 탓하고자 할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더구나 선생님께서 거듭 외치신 말들--산길에서, 오솔길에서, 자갈길에서, 바닷가 모래밭에서, 포장길 모퉁이에서, 낙석 무서운 외길에서 되뇌인-- 가족, 친지, 고마운 이들을 위한 축복의 기도에도 불평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또 있습니다. 선생님 자신에게로 향하는 애틋함의 기준에 따라 신의 성스러운 사자라고 하신 나귀와 며칠후에 만난 무심한 말을 차별대우 하시는 모습에도 시비걸 의도는 단연코 없습니다.       

<걸었다>의 100쪽 무렵 이후부터 저는 줄곧 불편했습니다. 선생님의 종교, 선생님이 가지신 믿음의 해석때문이 아니라 우리 독자를 자꾸 멀리 떼어 놓으시는 선생님의 말투와 산티아고와는 반대방향으로 가시는 듯한 선생님의 새로운 '편가름'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책의 종이장이 무거워지기 시작했고 불행하게도 제 영혼은 선생님의 맑아지는 영혼과는 반대로 불온해지고 경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제 불찰이고 모자람이 근원적 이유때문이겠죠~ 

기왕에 불손한, 경거망동한 독자로서 말씀을 드린 김에, 동행이신 치타라는 분뿐만아니라 그 모든 <걸었다>에 등장하는 마주친 이들에 대한 평가도 어쩜 그렇게 '권선징악'적 '사마리아인'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는지에 대해 저는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의 모든 것이 '어떤 잣대'로만 평가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싶은데,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가요?   

선생님께서는 '서영은'이라는 꼬리표때문에 이미 '독자와 함께 하는 이'시고 '서보영'을 고집하시지 않는 이상, '문학'과 따로 구분하여 우리에게 다가오지는 않는다면, 이번 순례의 길이 선생님 개인 차원의 '고백' 이상이었기를 바라는게 독자인 우리의 바램이고 기대일 수 있지 않을까요? 선생님의 신앙고백--결코 가치없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일이라 여기며 경의를 표합니다--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사는 이들에게 '세상의 참 모습' '인간관계의 진면목' 나아가서 이국 땅, 고행의 길에서 만난 '사람과 풍광'에 대한 더없는 애정과 남다른 해석을 기대한 우리가 잘못된 걸까요?  

선생님께서 간혹 들려주신 김동리 선생님과의 '옛일' 그리고 '선생님만의 판단(?)', 간략한 가족사....이런 것들이 이번에는 호사가들의 '흥미유발'이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것일 수도 있겠다 싶은데(아마도 선생님께서도 많이 망설이신듯 합니다), 잡으셨다 놓았다 하신 것 같습니다. 물론 주된 이야기는 아니지요. 

하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선생님의 뻔질난 해석과 평가, 성경(신구약을 넘나드는)에 대한 신학적 해석마저도 틸리히와 바르트, 토마스 아퀴나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 등을 그냥 넘나드는 정도라면 굳이 선생님께서 하시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또 선생님 개인의 신앙적 체험이라면 구태여 이번 기회에 만천하에 드러내지 않으셔도 괜찮지 않았을까요? 삭히고 다듬고 갈무리하고 두어도 향기는 날 터인데, 왜 그리 우리에게 알리려 안절부절하셨는지...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그렇습니다. 

역사, 철학, 예술, 그리고 그저 통칭하여 '문화'...이런 것들의 총화가 인간, 인류의 삶이라면 이번 선생님의 <걸었다>에는 '홀로'만 있을 뿐, '더불어'는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기행문'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요구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저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구요? 선생님은 소설쓰는 사람, 그 먼 스페인 땅의 작은 마을 '알베르게'에서도 여전히 선생님께서는 '작가'로 명명되셨잖아요?   부인하시렵니까, 아니면 포기하시렵니까? 

참, 저라는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난처했던 경험 하나, 소개해도 돼죠? 선생님께서는 편안하게 애교로 받아주시리라 믿으며....이 <걸었다>를 읽으며 가장 사람을 당혹스럽게 한 '한 장의 사진'--이럴수 있구나 싶었던, 그래서 선생님께 야유마저 보내고 싶었던 한 컷--............................. 

'[Sweet Caroline]을 들으시며 찌꺼기마저 걸러낼 듯한 울음을 울었다는 그 카페에서..세상에나 자신이 흘린 눈물 담긴 커피잔을 사진에 담아 오셨다니!!..저는 할말을 잊을뻔 했습니다. 그 뒤로는 글을 읽고 싶은 생각이 사실은 들지 않았는데....그래도 보았습니다.  그리도 버리고 버려서 마음과 몸을 정리하는 아름다움과 기쁨을 말씀하시더니 눈물을 쏟았던 기억만이 아니라 그 '물적 증거'인  처연한 감정의 흔적까지 사진으로 '박아'오셨다는 사실 앞에서 멍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너무 세밀한 부분에 신경쓴다고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로서는 일관된 흐름을 읽어야 했고, 모름지기 깨달음의 순간과 그런 득도의 이야기에는 앞뒤가 두루 맞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버릇없는, 두서없는, 그리고 정리되지 않은 이 편지를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선생님의 이번 글을 통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구하며, 버릴 건 버리고 새로이 얻는건 소중히 여기는 삶의 방식을 배우면서 한편으로는 선생님의 '화살표'가 아닌 선생님의 '걸었다'에 초점을 맞추어 보려 합니다. 그래서 제가 편지 앞머리에 '<걸었다>'라 하였습니다. 저는 차라리 '화살표'를 따르기 보다는 '걷는 게' 좋을듯 싶습니다. 물론 저는 '선생님의 화살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더구나 '제 화살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처지니까요.........    

생각은 있는데 선생님처럼 표현할 재주도 없고, 그나마 몇 줄 쓸 수 있다고는 하지만 선생님만한 깊이도 없는 독자는 이렇게 투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너그러이 봐 주시기를 망연히 간청할 따름입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건강 잘 살피시고 저희들에게 늘 귀한 말씀, 가슴 울렁이게 하는 '작품' 던져 주시길 바라며 인사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걸었다>를 통해 '인생을 또 걷게 해주셔서~" 

단기 4343년 5월,  봄같지 않은 봄날 밤, 독자같지도 않은 독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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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연못 2010-06-27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잘쓰셨습니다 . 그래서 먼 그대/ 아들의 여자/ 사막을 건너는 법/ 같은 지나간 책을 쓴 사람이 이 사람인가 ...하는 의문마저 ....도대체 뭣땜에 이 책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낸 건지 이해가 안 가는 1 人

자운 2010-06-28 00:1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동감하신다니 저로서도 다시 한 번 서영은 선생의 기독교 탐닉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물>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 김숨 장편소설
김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표지에서부터 '물' 한 방울이 번져 있다. 그래서 급기야는 그 '물' 한 방울이 삼백만톤의 홍수 아닌 홍수로 번져가고 때로는 녹슨 물이나마 한 방울도 찔끔거리지 않는 '갈증'과 '공황'의 상황으로도 전이된다. 결국 이 소설은 '물이 문제다' 

 서사구조는 의외로 단순하다. '불'인 아버지, '물'인 어머니, 그리고 소설의 화자 '나'인,'소금', '나'와 쌍둥이인 '금', 그리고 동생 '공기' 이렇게 부모와 딸 셋이 이룬 가정에서 어머니가 아닌 통상의 '물'을 둘러싼 그로테스크한 일들이 작품 전편에 그려진다.   

유일하게 '혼인'을 경험한 '나'는 더 이상 남편이 소금의 맛을 필요로 하지 않음을 깨닫고 '이혼'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마침 공교롭게도 같은 날, 어머니인 '물'은 장차 자신이 그곳에 담기게 될, 자신의 주검이 누워 부패하게 될 수족관을 들여오고 어머니와의 갈등 불화로 가출했던 아버지인 '불' 또한 돌아온 탕자로 집에 도착한다. 얼음과 물 그리고 가끔은 수증기로 변하는 어머니는 그런 과거의 일상을 반복하고 있고 빛나는 외양과 찬란란 정신으로 사랑받던 쌍생아 동생 '금'은 이른바 정신장애를 겪고 있으며 막내인 '공기'는 '하늘의 영광, 우리 주 예수'를 찬미하는 종교적 생활에만 몰두하고 있는 가운데, '불'인 아버지는 낮잠과 음주로 소일하는 무위도식의 생활을 잇는 중에 '나'인 '소금'만이 고군분투하며 가족생활의 이모저모를 꾸려가는데.....먹어야 할 물, 씻어야 할 물--즉, 생존의 물, 생명의 물--이 갑작스레 끊어지면서 우여곡절의 사건이 벌어진다. 가족의 특이한 일상과 기묘한 사건들을 관찰하고 대처하며 변화 혹은 대응을 하는 이는 오직 화자인 '나', '소금' 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늑하고 운치있는 풍경을 자아내던 저수지가 있는 시골마을을 뒤엎어 공장이 들어서고 축사가 세워지는 한편, 아버지가 할머니께서 물려주신 저수지를 메워 '공중호텔'(아마도 말 그대로 물을 쫓아낸 후 만들어진 허망의 욕망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허공 속에 붕 뜬 구조물, 혹은 사상누각이라는 뜻이리라)을 만들면서 평화로운 '자연'은 파괴되고 혼돈의 '인공'이 생겨나는데, 급기야 그 인공의 대표물이자 이 가족의 쉼터인 '집'에 변고가 생긴다. 수도가 모두 제 구실을 못하고 먹을 물마저 없어지는 비참 상황이 발생한는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도 수도 계량기는 마치 팽이 돌듯 빠르게 돌아가고 이를 이유로 등장한 수도검침원인 노파가 밀린 물세를 독촉하는 한편, 가족의 삶의 터전인 집이 거액의 은행대출로 지어졌음이 드러나고 급기야 대출금 미상환에 따른 은행의 최고와 차압이 뒤따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막힌 수도관을 찾느라 집은 군데군데 벽이 뚫리고 허물어지며 수도관 수리를 위해 느닷없이 등장한 수상한 배관공과 '금'의 동침으로 '금'은 잉태하고 어머니는 죽음을 맞아 텅 빈 수족관에 시신이 방치된다. 잠시 자신의 연원을 찾아 새로운 기운을 되찾고자 하는 '나' '소금'은 '소금 섬'을 찾는 짧은 여행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금'은 출산하는데 자신의 정신장애에 비견되는 '신체장애아'인 '납'을 세상에 내놓는다. 

나오지 않는 '물'을 둘러싼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이 점철되는 가운데 드디어 개발로 인해 사라진 300만톤의 물이 한꺼번에 넘쳐 흐르며 집은 마치 쓰나미를 맞은 바닷가 마을마냥 폐허처럼 변하고 만다. 자나 깨나 오직 '신'의 은혜와 기적, 기도와 찬양으로 일관하던 '공기'와 신생아 '납'의 어미 구실도 못하던 '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겨우 목숨을 건진 아버지 '불'과 '나', 그리고 어린 아이 '납'만이 살아남아 풍비박산난 집을 추스린다.       

작품은 결국 살아남은 아버지와 나, 그리고 납이라는 3대의 동거 속에 아버지가 집을 대대적으로 수리 개축하여 '공중호텔' 간판을 새로이 다는 것으로 대강의 마무리를 하게 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시종일관 많은 알레고리를 엮어 우리에게 '물' '불 '공기' '금' '소금' '납'을 천착하게 하는데, 이는 당연히 '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작품에 나타나는 기기묘묘한, 비정상적 가족 구성원들이 보여주는 일상의 느낌을 거부하는 각종 에피소드를 그저 소통부재의 가족해체 정도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작가는 우리에게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듯 하다. 물에 수장된 고대도시를 열거하는 등(이 점에 있어서는 작가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공기'가 그토록 매달리는 신앙, 즉 기독교 경전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도 한 몫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인류가 자랑하는 위대한 성취라는 것들이 결국은 '물거품'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수 천년 동안 이룩한 문명 전반에 대해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를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근원인 '물'과 '공기'(우리 모두를 포함하여 살아있는 것들은 바다속 깊은 곳에서 무기물의 합성을 통한 최초의 유기체로 시작하지 않았는가? 또한 그 미세한 유기체가 공기로 인하여 처음의 식물로 변했고 드디어는 원시동물군을 생성하지 않았던가? ), 인류문명의 근원인 '불', 그리고 생명유지에 필요한 '소금' 혹은 삶의 도구으로서의 '금'과 '납'(금속)을 등장시켜 전하고자는 상징은 사고의 영역을 거시적으로 넓혀갈 것을 요구하고 있음이다. 

그런데 작가는 지나간 과거 또한 물에 대한 우리의 반역이 비극을 초래하고 재앙을 만들어 냈듯이 앞으로의 미래 또한 그리 낙관적이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3세대로 태어난(엄밀히 말하면 거대한 물을 소유했던 할머니까지 포함하여 4대째라 할 수 있지만) '납'이 '등골이 휘어진' 비정상 이라는 점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또한 '납'은 할아버지인 '불'의 정기를 받아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고 있지 않은가? 권위와 폭압의 상징인 '아버지'가, 거대한 탐욕과 식탐으로 대변되는 '불'의 위력이 '납'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것은 '희망적' 이라기보다는 '암울한 미래'를 암시하고 있지 않겠는가? 

흥미보다는 고뇌어린 탐색을 요구하는 '소설읽기'가 그리 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수많은 알레고리의 연속인 곡절을 따라가면서 '해석'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다만, 지나치게 모식적으로 대비한, 마치 한 편의 잘 짜여진 도표을 보며 줄잇기를 해가는 듯하여 부담스러운 기분도 든다. 글로 풀어 쓴 '해석학이론' 소설문장으로 바꾼 '바슐라르의 미학에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음은 독자에게 생경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작가가 깊이 탐구했음직한 '상상력의 과학철학자'이자 시인인 가스통 바슐라르의 상상력의 미학에 대한 대강의 거친 요약을 사족으로 덧붙여 본다.          

****(서평리뷰에 대한 사족) 

바슐라르의 상상력 연구는 객관적 인식의 정신 분석을 통해서도 쉽게 제거되지 않는 인식론적 방해물들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객관적 앎/지식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바로 상상력이다. 그런데 바슐라르에 의하면 상상력은 그 자체의 고유한 법칙을 갖고 있다. 그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보편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이미지의 원형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하는데, 상상력이 이 원형을 향해가는 정신의 자체적인 힘이다.

따라서 이미지의 원형과 외계의 사물 사이에 놓인 상상력은 끊임없이 사물을 원형에 가깝게 변형시키려는 관성을 갖게 된다.

바슐라르 이전의 상상력은 이미지를 기억하는 정신 기능이었다. 하지만 바슐라르는 인간의 상상력은 대상의 형태가 아니라 그것의 물질성을 들여다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물은 일정한 형태가 없지만 물의 이미지는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바슐라르는 물, 불, 공기, 대지의  물질성을 통해 인간의 상상력이 유형화된다는 사원소론을 정초한다. 인간의 상상력은 이미지를 기억할 뿐 아니라 변형하고 극단적으로는 이미지를 지워버림으로써 <이미지 없는 상상력>의 단계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고 한다.

물 위에 비친 자기 얼굴의 아름다움에 취한 나르시스의 신화는 상상력의 작용을 잘 보여준다. 거울에 뚜렷하게 비친 얼굴보다 물 위에 흐릿하게 비친 얼굴이 더 아름답다. 또 물 위에 핀 연꽃을 찍은 사진보다 그것을 그린 모네의 회화가 더 아름답다. 이러한 이유는 물위의 영상이나 회회의 영상은 흐릿하지만 그것 들여다보는 인간의 상상력은 수면의 파동을 따라, 또 그림을 따라 끊어진 부분을 이어가면서 하나의 영상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르시스의 경우 물 위의 영상이 아름답다고 느끼고, 모네의 그림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상상력의 밑바닥에 대상에 대한 사랑이 들어있기 때문이고 바슐라르는 말한다.

바슐라르는 상상력을 심리적, 사회적 요인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그 자체에 존재론적인 지위를 부여한다. 상상력은 과학에 있어서는 인식론적 장애물이지만 문학/예술에 있어서는 미적 체험과 존재의 전환을 경험할 수도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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